대외 변수로 물가 오르기에 정부 노력 한계 개인, 기업도 ‘3인 4각’ 기대인플레 잡아야
박형준 경제부장
3년 2개월의 일본 도쿄특파원 생활을 마치고 3월 19일 귀국했다. 인천공항에 도착했더니 목이 칼칼해 편의점에서 500mL 녹차 음료를 샀다. 가격은 1600원. 오미자, 흑미, 보리 등 기능성이 가미된 음료들은 2000원을 넘었다. 일본에선 같은 크기의 녹차 음료를 120엔(1224원·당시 매매기준율 100엔=1020원 적용)이면 살 수 있다.
서울 광화문에서 1만 원으로 점심을 먹으려면 간당간당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도쿄에선 같은 금액으로 넉넉하게 점심을 먹을 수 있다. 긴자 인근 자주 가던 태국음식점은 전채, 메인 요리, 후식까지 갖춰 800엔이다. 그 옆 인도음식점도 비슷한 구성을 1000엔에 판다. 점차 물건 값이 싸지는 일본에서 살다 귀국했기에 한국의 ‘물가 충격’에 자주 놀랐다.
고물가는 이미 한국 경제의 중요한 위험 요인이 돼 있다. 4월 소비자물가는 전년 동월에 비해 4.8% 올라 13년 6개월 만에 최고다. 물가는 돈의 가치를 야금야금 갉아먹는 ‘악마’에 비유된다. 특히 서민의 삶이 더 팍팍해진다. 정부가 긴장해 대응에 나설 수밖에 없기에 10일 출범한 윤석열 정부도 온갖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을 것이다.
일본 사례에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현재 일본도 한국과 비슷하게 물가 상승 압력을 받고 있다. 3월 일본의 ‘기업물가지수’는 전년 동월 대비 9.5% 폭등했는데, 이는 2차 석유위기 영향이 남아 있던 1980년 12월(10.4%) 이후 최고다. 기업이 원자재 가격 급등의 직격탄을 맞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3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2%에 그쳤다. 일본 기업들이 자체 이윤을 줄이고 소비자가격 인상을 최소화하며 대응에 나선 결과다.
대장성(현 재무성) 관료 출신인 와타나베 쓰토무(渡변努) 도쿄대 대학원 교수는 최근 아사히신문 인터뷰에서 “일본 소비자 마음속에 1엔이라도 허투루 사용하지 않으려는 생각이 물가 상승을 막고 있다”고 진단했다. 가격에 민감한 소비자들, 그리고 그들의 눈치를 살피는 기업이 소비자물가 급등을 억누르고 있는 셈이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저녁 식사 예약을 위해 서울 광화문 인근의 과거 단골집들에 전화를 돌렸다. 특파원으로 출국하기 전보다 1인당 2만∼3만 원씩 가격이 올라 있었다. 그런데 A음식점에서 “1인당 5만 원짜리를 예전 가격 3만 원에 드리겠다. 앞으로도 계속 이용해 달라”고 했다. 남들이 가격을 다 올렸으니 그 음식점도 손쉽게 가격 인상을 선택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분명 저렴한 재료로 대체한 요리를 개발하면서 품질은 과거처럼 유지하려 고군분투하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앞으로 물가가 오를 것이라고 생각하면 지금 소비를 더 하게 되고, 그런 심리가 물가를 끌어올린다. 4월 기대인플레이션율(소비자가 예상하는 향후 1년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1%로, 2013년 4월(3.1%) 이후 9년 만에 최고다. 당분간 고물가는 지속될 것이다. 정부뿐 아니라 개인과 기업이 ‘3인 4각’으로 협력해야 악마로부터 입는 피해를 줄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