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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내 낼 수 없는 세월의 멋[김학선의 음악이 있는 순간]

입력 | 2022-05-11 03:00:00

〈29〉 최성수 ‘Whisky On The Rock’



김학선 대중음악평론가


2015년 EBS ‘스페이스 공감’ 무대에 최성수가 올랐다. 그의 옆에는 러시아에서 온 아코디언 연주자 알렉산드르 셰이킨이 있었다. 최성수는 아코디언 연주에 맞춰 ‘해후’를 불렀다. 감히 ‘기품’이란 표현을 써도 될 정도로 고급스러운 무대였다. 다른 무대에선 아코디언 대신 바이올린과 합을 맞춰 ‘해후’를 부르기도 한다. 그 무대들을 볼 때마다 ‘성인 가요’란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최성수의 ‘지나간’ 노래 하나가 최근에 다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2002년에 발표한 ‘위스키 온 더 록(Whisky On The Rock)’이란 노래다. 앨범의 타이틀곡도 아니어서 최성수의 팬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이 모르고 지나가버린 노래를 한 드라마가 다시 살려냈다.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배우 이정은이 부른 노래가 화제가 되며 원곡까지 뒤늦게 조명받은 것이다. 극의 내용과 이정은의 캐릭터가 겹치면서 노래는 마치 인생을 경험한 어른들의 주제가처럼 되었다.

생각해 보면 최성수의 노래는 늘 그랬다. 처음 언급한 ‘해후’ 역시 마찬가지다. 흔히 쓰지 않는, 그렇지만 발음만으로도 근사한 낱말을 제목으로 가진 이 노래는 긴 시간을 돌아 우연히 마주친 남녀가 과거의 마음을 확인하고 다시 이별을 받아들여야 하는 심경을 노래하고 있다. 그의 또 다른 히트곡 ‘남남’이나 ‘잊지 말아요’ 같은 절절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한때 엽기송이라 불렸던 ‘누드가 있는 방’도 그보다 훨씬 ‘찐한’ 성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누드가 있는 방’이 한때 누리꾼들에게 엽기송이라 불렸던 이유는 바람둥이 화자의 내레이션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를 표현하는 방식 자체가 무척이나 신선했다. 노래가 없이 내레이션만으로 곡을 끌고 가는 방식이 그랬고, 재지(Jazzy)한 비트와 트럼펫을 전면에 앞세운 과감한 사운드 연출은 노래가 나온 1993년엔 특히 더 파격적이었다.

최성수는 1980년대의 흔한 인기가수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지만, 그가 만들었던 곡들은 기존의 가요와는 결이 조금 달랐다. 그는 당시 많은 영향을 받았던 영미권 팝 대신 유럽 스타일의 음악을 많이 불렀다. 이호준과 왕준기라는 당대의 명편곡가들과 함께 만든 음악은 그래서 고급스러웠고 고유의 스타일이 있었다. 글의 처음에 ‘기품’이란 말을 쓴 이유다. 그는 늘 다른 스타일을 고민했고 새로운 음악을 도입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거기에 늘 어른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건 최성수 음악의 또 다른 미덕이다. 한국에서 ‘어덜트 컨템포러리’(성인 취향) 음악의 부재는 늘 아쉽지만, 그렇기에 더 최성수 같은 아티스트를 재평가해야 한다. 그래서 최성수란 이름과 ‘Whisky On The Rock’이 다시 들리는 건 반갑다. 노래 가사 그대로다. “세월의 멋은 흉내 낼 수 없”다. 이정은이 부른 ‘Whisky On The Rock’이 더 찐하게 다가온 이유일 것이다.


김학선 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