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년 만의 개방으로 일반인에 공개 여래좌상, 외관 수려 ‘미남불’ 별칭… 일제강점기 때 경주서 서울로 옮겨 이승만이 현판 쓴 ‘오색구름’ 오운정, 고종 때 만들어 풍류 즐기던 침류각 700년 넘게 한자리 지킨 ‘주목’ 등 문화유산 61점-자연유산 관람 가능
10일 청와대 안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 대통령 관저 뒷길로 15분가량 오르자 듬직한 불상 하나가 보였다. 108cm 높이에 시원한 이목구비, 유연하게 흘러내리는 법의(法衣) 자락이 눈길을 끈다. 생김새가 수려해 일명 ‘미남불(美男佛)’로 불리는 보물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이다. 출입이 금지됐던 관저 주변이 10일 74년 만에 전면 개방되면서 일반인들도 미남불을 직접 감상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됐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조선시대 경복궁 후원이던 청와대 경내에는 석조여래좌상을 포함해 61점의 문화유산이 분포돼 있다. 청와대 권역은 고려 숙종 때인 1104년 남경의 이궁이 있던 곳으로 예부터 풍수지리상 길지(吉地)로 꼽혔다. 실제 관저 뒤쪽에는 300∼400년 전 바위에 새긴 ‘天下第一福地(천하제일복지·세상에서 가장 길한 명당)’ 각자가 있다. 청와대 권역에는 고려 시대부터 조선, 일제강점기를 거쳐 대한민국까지 918년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
청와대 경내 문화유산 중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석조여래좌상. 9세기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불상의 예술적 가치 못지않게 비운의 역사를 담고 있어서다. 이 불상은 일제강점기인 1912년 경북 경주를 순시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에 의해 경주에서 경성 왜성대(倭城臺·현 서울 남산 일대)의 총독 관저로 옮겨졌다. 이와 관련해 일본인 도굴꾼 모로가 히데오는 “경주 이거사 절터에 있던 완전한 석불좌상 1구가 1913년 서울로 옮겨졌다”는 기록을 남겼다. 불상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39년 총독부가 현 청와대 자리에 총독 관사를 신축하면서 이곳으로 다시 옮겨졌다. 이후 1989년 대통령 관저를 신축함에 따라 현 위치인 북악산 기슭에 자리를 잡았다.
대통령 관저 너머 산책로를 거닐다 보면 청와대에 남은 유일한 정자 ‘오운정(五雲亭·서울시 유형문화재)’을 볼 수 있다. 오운정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당시 지은 건물로 1989년 대통령 관저 신축 때 이전됐다. 이곳 현판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직접 썼다. ‘오색구름이 드리운 풍광이 마치 신선이 노는 곳 같다’는 뜻의 이름은 경복궁 후원에 있던 오운각에서 따온 것이다.
오운정에서 이어지는 산책로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1905년 8월 현 대통령 관저 자리에 처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전각 ‘침류각(枕流閣·서울시 유형문화재)’이 나온다. ‘흐르는 물을 베개 삼는다’는 뜻을 지닌 이곳은 과거 풍류를 즐기던 장소였다. 고종 때 경복궁 신무문(神武門) 밖 후원에 건립한 건물들 중 청와대에 남아 있는 유일한 건물이다. 이 전각도 1989년 대통령 관저 신축 때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청와대 경내에서는 문화유산뿐 아니라 오랜 역사를 간직한 자연유산도 만나볼 수 있다. 본관 옆 ‘수궁(守宮) 터’에는 744년간 한자리를 지킨 주목(朱木)이 서 있다. 이 나무가 심어진 수궁 터에는 조선시대 궁궐을 방어한 군사들이 주둔한 건물이 있었다. 줄기가 붉다는 뜻의 주목은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 썩어서 천년, 합해서 삼천년을 간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끈질긴 생명력을 지녔다.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산림학)는 이 나무가 고려 충렬왕 재위기인 1278년 무렵 심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박 명예교수는 “땅의 주인은 물론 시대가 바뀌는 700여 년 동안 변함없이 한자리를 지킨 유구한 역사의 자연유산”이라며 “많은 국민들이 찾아오는 만큼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적극적으로 수목 보호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