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컬렉션 숨은 1인치]〈1〉경현당 갱재첩 1741년 춘추집전 경연 후 잔치서 신하들이 사도세자 영민함 칭찬하자 영조 “노는데 정신 팔렸다”며 면박… “아들 자만 않도록 엄한 교육” 해석 “서자 출신 탓 과도한 훈육” 반론도… 이복형 ‘경종 시해설’ 시달리던 영조
1741년(영조 17년) 왕이 사도세자, 신하들과 경희궁에서 벌인 잔치(선온)를 묘사한 ‘경현당 갱재첩’ 속 그림(위 사진). 전각 가운데 일월오봉도 앞자리와 그 오른쪽 자리에 영조와 사도세자가 각각 앉았다. 관례에 따라 신하들의 뒷모습만 그리고 왕과 세자는 자리만 표시했다. 아래는 왼쪽 사진부터 국립중앙박물관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에서 갱재첩을 설명하는 동영상, 영화 ‘사도’(2015년)에서 영조와 사도세자가 대면하는 장면, 영조를 그린 조선시대 어진(초상화). 국립중앙박물관·국립고궁박물관 제공·동아일보DB
《‘숨겨진 1인치를 찾았다.’ 26년 전인 1996년 큰 주목을 받은 삼성전자 TV 광고 문구입니다. 축구 경기에서 화면에 보이지 않던 선수가 슛을 성공시키는 모습을 보여주는 명장면이죠. 유물도 눈에 당장 보이지 않는 가치가 더 빛날 때가 있습니다. 동아일보는 ‘이건희 컬렉션’ 기증 1주년을 맞아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유물 및 작품에 담긴 사연을 통해 숨은 가치를 발견하는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지난달 28일 개막한 국립중앙박물관의 ‘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에는 유독 중년 여성들이 몰리는 전시품이 있다. 자식 키우는 어머니 입장에서 280년 전 빛바랜 책을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에는 애틋함이 묻어 있다. 2부 중간 통로에 자리 잡은 ‘경현당 갱재첩(景賢堂 갱載帖)’이다. 1741년(영조 17년) 마흔일곱의 왕이 4년에 걸친 춘추집전(春秋集傳) 경연을 마친 것을 기념해 일곱 살의 사도세자와 신하 13명을 불러 경희궁에서 벌인 잔치(선온)를 그림과 글로 남긴 책이다. 전시장 벽면에는 ‘아들을 못 미더워하는 아버지의 불안함이 훗날 비극의 씨앗이 되고 말았습니다’라는 의미심장한 문구가 붙어 있다. 그런데 과연 이때부터 부자간의 비극이 시작된 걸까. 가로 38.5cm, 세로 27.5cm의 이 작은 책에 담긴 진실은 무엇일까.
○ 집착인가, 부정(父情)인가
“세자의 덕스럽고 총명한 모습은 근엄하고, 나라를 도울 공부에 박차를 가하니 국가의 끝없는 복이 참으로 여기 달렸습니다.”(좌승지 김상성)갱재첩에는 영조가 지금의 대통령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承政院), 학문 및 정책 연구기관인 홍문관(弘文館) 관리들과 더불어 사도세자에 대해 대화하는 장면이 기록돼 있다. 자식 자랑을 하면 팔불출이 될까봐 그랬을까. 영조는 사도세자의 영민함을 칭찬하는 신하들에게 “노는 데 정신이 팔려 공부를 게을리한다”며 세자 앞에서 면박을 준다. 그러곤 잔치를 벌이기 전 학습교재(동몽선습)를 가져오게 한 뒤 세자가 배운 부분을 읽도록 했다. 세자는 이를 막힘없이 읽었다.
우승지 이도겸이 “1장을 강의한 지 100여 일이 지났는데도 잊은 곳이 없다. 어린 나이에 기억력이 뛰어나다”고 거듭 칭찬하지만 영조는 다른 시험을 낸다. 한자음 3개를 들려주고 해당 글자를 책에서 가리키도록 했는데 세자는 이번에도 통과한다. 영조는 그제야 “동궁(세자)이 처음에 3번 정도 읽고 겨우 음과 토에 익숙해지자 곧 암송할 수 있었다”며 은근히 자식자랑을 한다.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조선후기사)는 “아들이 자만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엄한 교육을 시킨 것이지 이때부터 사도세자와의 비극이 시작됐다고 보는 건 무리”라고 말했다.
반면 학문이 높았던 영조가 아들을 자신의 눈높이까지 끌어올리려 한 집착이 이 대목에서 읽힌다는 견해도 있다. 서자 출신으로 숙종의 적통이 아니라는 콤플렉스가 세자에 대한 과도한 훈육으로 이어졌다는 것. 허문행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영조는 유독 신하들 앞에서 어린 세자가 공부 못한다는 소리 듣는 걸 용납하지 못했다. 사도세자가 왜 비극적인 상황을 맞았는지에 대한 단초가 갱재첩에 담겼다고 보고 이를 전시에 반영했다”고 설명했다.
○ ‘통치 정당성’ 확보에 올인
사실 이날 잔치는 차기 권력인 세자에게 미래의 집권층을 형성할 젊은 관료들을 소개하고, 이들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자리였다. 영조는 세자에게 “여기 있는 신하의 할아버지와 부친은 모두 역대 임금들을 섬겼다. 그리고 이들의 자식과 손자도 모두 너와 함께 늙어갈 사람이니 너는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날 등장하는 신하들 상당수는 40세 전후의 젊은 청요직(淸要職·언로 역할을 한 중하위직) 관리들로 당파 싸움에서 한발 떨어진 이들이었다.당시 상황은 영조의 콤플렉스는 물론 권력 기반과도 엮여 있었다. 이인좌의 난 때 반대파가 주장한 영조의 ‘경종 시해설’이 통치의 정당성을 훼손했기 때문이다. 이에 영조는 탕평책을 실시하며 자신의 이복형 살해 혐의를 벗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경종 시해 혐의로 노론 인사들이 대거 숙청된 1722년(경종 2년) 임인옥사(壬寅獄事)를 무고에 의한 억울한 옥사라고 판정한 1740년(영조 16년) 경신처분(庚申處分)이 대표적이다. 갱재첩이 발간되기 바로 직전 해에 벌어진 일이다. 이근호 충남대 교수(조선후기사)는 “영조는 자신이 형의 죽음과 관련이 없다는 걸 경현당 갱재첩이 발간된 1741년까지 강조한다”며 “갱재첩은 영조가 신하들과 더불어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천명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