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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땅도 봄은 못 막는다” 보도통제 뚫고 민주화 희망을 전하다

입력 | 2022-05-13 03:00:00

[다시 보는 5·18민주화운동]
〈상〉 5·18 이끈 ‘들불야학’



윤상원 열사의 지인들은 윤 열사에 대해 “고등학생 시절에도 부모님에게 말하고 여행을 떠나는 등 낭만이 있었던 청년”이라고 입을 모은다. 사진은 윤 열사가 악기를 연주하며 즐거움을 느끼던 모습. 들불열사기념사업회 제공


광주 5·18민주화운동 당시 ‘들불야학’ 사람들은 ‘5월의 진실’을 전한 소식지 ‘투사회보’를 제작하는 한편 시민군 지도부 구성과 최후 항쟁을 주도했다. 5·18 이후에도 빈민, 학생, 청년, 문화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들불야학 활동가 가운데 1978∼1998년 박기순(여·1958∼1978), 윤상원(1950∼1980), 박용준(1956∼1980), 박관현(1953∼1982), 신영일(1958∼1988), 김영철(1948∼1998), 박효선(1954∼1998) 등 7명이 세상을 떠났다.

이들은 ‘7인의 들불열사’로 불리며 꺼지지 않는 ‘역사의 들불’로 승화했다. 동아일보는 5·18민주화운동 42주년을 맞아 들불열사들이 간직했던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치열했던 삶의 흔적을 3회에 걸쳐 살펴본다.

“꽁꽁 얼어붙었던 땅들도 오는 봄을 막지 못하고…”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대변인이었고,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인 윤상원 열사가 들불야학 제4회 체육대회(1980년 5월 4일)를 맞아 자필로 작성한 메모의 일부분이다. 윤 열사는 이 메모에서 “험악했던 세상사도 정의 앞에서 무릎을 꿇어가는 요즈음에 구체적인 투쟁의 장을 찾아 헤매는 졸업 강학 및 졸업생 여러분 몸성히 잘 있는지요?”라며 1980년에 찾아온 ‘서울의 봄’, 이른바 민주화에 대한 희망을 적었다.

이어 윤 열사는 “들불 선배님들 및 음으로 양으로 저희 들불을 지켜봐주신 외부 인사들 덕분에 저희 야학은 아무 일 없이 잘되어 가고 있답니다”라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들불열사들의 희생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설립된 사단법인 들불열사기념사업회는 15년 동안 열사들의 메모, 사진, 일기 등 660여 점을 수집했다. 윤 열사의 메모는 그의 유품 27개 중 1개인 노트에 적혀 있었다.

최근 처음으로 공개된 이 메모는 1980년 4월 준비하던 체육대회를 들불야학 식구들에게 알리기 위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상호 들불열사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1980년 5월 초 광주 서구 광천동에 사는 청년들과 들불야학 식구들이 체육대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며 “5·18 기간 동안에 윤상원 열사의 자필 메모가 없는 것을 감안하면 5·18과 가장 가까운 시기에 작성된 친필 메모로 평가된다”고 말했다.

1950년 전남 광산군 임곡면(현재 광주 광산구 임곡동) 천동마을에서 태어난 윤 열사는 광주 살레시오고를 졸업하고 3수 끝에 전남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외무고시를 준비하며 평범한 대학 생활을 하던 그는 학교 선배 김상윤 씨의 권유로 역사 공부를 시작했고, 경제 발전 이면에서 신음하던 노동자의 삶을 접하며 변화에 대한 갈망에 사로잡혔다.

1978년 2월 주택은행 서울 봉천동지점에 취업했지만, 윤 열사의 동생 태원 씨(62)는 “형님은 주택은행에 취업할 때부터 1년 뒤 사회운동에 헌신하겠다는 신념이 확고했다”고 회고했다. 윤 열사는 1978년 9월 자신의 결심을 실천하기 위해 광주로 내려와 들불야학 강학(교사)들을 만났다. 당시 들불야학 교실은 광천동 성당과 광천시민아파트 C동 3층 등 두 곳에 있었고, 학강(학생) 20∼30명이 2개 반에서 하루에 2시간씩 공부했다. 윤 열사는 이듬해 1월부터 광천동 공장과 양동 신협에서 일하며 강학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윤 열사는 당시 광천시민아파트 B동 1층에 자취를 했다. 33m² 넓이의 방에 나무합판을 세워 절반으로 쪼갠 방이었다. 통금이 있던 때라 강학들과 학생들은 늦은 시간이 되면 윤 열사의 방에서 잠을 잤다. 윤 열사의 방은 들불야학 식구들의 사랑방이자 학습 공간이었다.

12·12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조치를 전국으로 확대하며 학생, 정치인, 재야 인사 등 2699명을 체포했다. 다음 날 광주에서 계엄군이 잔혹한 진압에 나섰지만, 저항할 지도 세력이 사실상 전무한 상태였다.

이때 윤 열사 등 들불야학 사람들이 전면에 나서 5·18을 이끌었다. 5월 25일 학생수습위원회에서 새로 편성된 항쟁지도부(민주투쟁위원회)의 대변인을 맡은 윤 열사는 1980년 5월 26일 기자회견을 열고 외신기자들에게 계엄군의 학살 사실을 알렸다. 이어 5월 27일 최후의 순간까지 전남도청을 지키다 계엄군이 쏜 총에 눈을 감았다. 전용호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자문위원은 “윤 열사는 5·18 당시 광주를 벗어나지 않고 끝까지 신념을 지키고 실천한 시민운동가”라고 말했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