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남루이자 씨(왼쪽)와 손녀 남아니따 양. 뉴시스
올해 3월 인천국제공항 풍경입니다. 한 소녀가 달려옵니다. 할머니 한 분이 소녀를 안고 울음을 터뜨립니다. 이 소녀는 우크라이나 출신 고려인 남아니따 양(10)입니다. 아니따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가족과 함께 우크라이나를 탈출해 우리나라로 왔습니다. 할머니 남루이자 씨(56)는 이미 한국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요? ‘고려인’이라는 명칭으로 보아 우리 동포 같은데 어째서 가까운 간도나 연해주가 아닌, 그 먼 우크라이나까지 가서 살게 되었을까요? 이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과 그가 벌인 소수민족 강제 이동 정책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볼셰비키 혁명으로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을 세운 레닌이 죽자 1927년 스탈린은 모든 반대파를 숙청하고 권력을 잡습니다. 스탈린은 1953년 74세로 죽을 때까지 과학과 중공업을 발전시켜 소련을 세계 최강의 강대국으로 만들었다는 평가도 받지만, 한편으로 오랜 독재로 많은 사람들을 고생시키기도 합니다. 조선 후기부터 경작지를 찾아 두만강을 넘어 일찌감치 연해주 지역에 자리 잡았던 우리 민족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유리창 하나 없이 널빤지로 문을 막은 열차 안에서 3∼4주 동안 무려 6000km를 이동해 중앙아시아로 끌려갑니다. 그러는 동안 굶주림과 추위, 질병과 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얼마 전 국내로 유해가 돌아온 독립영웅 홍범도 장군도 이때 강제 이주되어 결국 머나먼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일제강점기 나라 없는 약소민족의 비애였지요.
이때 중앙아시아로 끌려간 고려인은 대략 16만여 명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모두 허허벌판에 땅굴을 파거나 움막을 짓고 살아야 하는 척박한 환경과 마주합니다. 거주 이전의 자유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절망만 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벼농사와 목화 농사를 시작해 경작지를 점차 크게 늘려 나갑니다. 고려인 특유의 근면함은 이들을 안정적인 삶으로 이끌었습니다. 교육열도 높았고, 전통문화를 지키려는 노력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유라시아 중심부 지역을 한민족의 활동 무대로 만든 선구적 개척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들은 스탈린이 죽은 뒤인 1956년에야 비로소 거주 이전의 자유를 얻습니다. 그리고 1989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스탈린의 강제 이주에 대해 ‘불법적 범죄 행위’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서려 있는 우리의 아픈 근현대사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