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뉴욕에 사는 여성 키티 제노비스가 새벽에 귀가하던 도중 주택가 노상에서 흉기를 든 강도를 만났다. 그녀는 소리를 지르며 30분 넘게 저항했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2주 뒤 뉴욕타임스가 ‘살인을 목격한 38명은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는 제목의 기사를 실어 미국에서 논란이 됐다. ‘방관자 효과(Bystander effect)’라는 심리학 용어가 이 사건을 계기로 생겼다. 주변에 사람이 많을수록 책임이 분산되어 오히려 위험에 처한 사람을 덜 돕게 된다는 뜻이다.
▷11일 오전 6시경 서울의 한 아파트 입구에서 60대 남성이 필로폰 성분을 투약한 40대 중국 국적의 남성에게 1분 만에 ‘묻지 마 살인’을 당했다. 가해자는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피해자에게 갑자기 발길질을 하더니, 도로 경계석으로 피해자 얼굴을 내리쳤다. 피가 분출하는 등 출혈이 심했지만 목격자들은 아무도 가해자를 말리지도, 피해자를 구조하지도 않았다. 한국판 ‘제노비스 사건’이라고 할 만하다.
▷아파트 입구 맞은편 가게에 있는 폐쇄회로(CC)TV에 찍힌 목격자만 53명이었다. 인력알선업체 등으로 출근을 서두르거나 산책을 나온 주민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중국 국적 거주자가 많은 이 지역은 평소에도 새벽에 누워 있는 취객이 많았다고 한다. 오전 6시 7분경 거동이 불편한 남성이 “누군가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다”는 첫 신고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60대 남성은 숨을 쉬고 있었는데, 경찰과 소방이 현장에 도착한 10분 뒤에는 숨진 채 발견됐다.
▷53명에게는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보통사람이라면 가해자를 제지하다가 되레 피해를 입거나 보복 범죄를 당하지 않을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들과 달랐을 것이라고 100%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지도 의문이다. 그렇다고 이런 일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사회가 되는 것은 최악이다. 이런 씁쓸한 세태를 개선하기 위해 시민의식을 끌어올리면서, 가능하면 개개인이 그처럼 곤란한 상황에 부딪히지 않도록 치안과 응급구조의 허점도 메워야 한다.
정원수 논설위원 needju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