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초부터 러시아군이 봉쇄 중인 우크라이나 남동부 요충지 마리우폴의 61세 남성이 러시아군의 폭격과 민간인 학살 위험을 무릅쓰고 반려견 한 마리를 대동한 채 225km 떨어진 남부 자포리자까지 탈출해 화제다.
13일 영국 가디언은 1면 머리기사에 전직 요리사 출신 이고르 페딘 씨의 마리우폴 탈출기를 소개했다. 러시아군이 마리우폴 곳곳에 미사일 공격을 가하고 음식과 물 또한 바닥나자 그는 지난달 23일 생필품 가방 한 개, 9살짜리 반려견 ‘주주’와 무작정 집을 떠났다. 치열한 전투로 도로 곳곳은 패여 있었고 시체 또한 즐비했다. 종종 폭발음이 들리고 장갑차가 지나갈 때마다 진동을 온몸으로 느껴야 했지만 신경 쓰지 않고 걷는 데 집중했다.
페딘 씨는 첫 날 마리우폴에서 20km 떨어진 니콜스케의 한 마을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러시아군에 의해 16세 아들을 잃었다는 아버지를 만났다. 페딘 씨는 “15년 전 술을 끊었지만 ‘오늘 아들을 묻었다’는 남자 앞에서 차마 술을 거부할 수 없었다”며 그와 보드카를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다.
자포리자에 가려면 꼭 통과해야 하는 다리를 지날 때는 이 다리가 일부 파괴돼 자칫 발을 잘못 헛디디면 30m 아래로 떨어질 위험에 처했다고도 소개했다. 천신만고 끝에 다리를 건넌 그 앞에 갈림길에 나타났다. 그는 어느 쪽 길이 자포리자로 이어지는지 몰랐지만 한 트럭 운전자가 돌연 그 앞에 멈춰서더니 그를 2시간 동안 태우고 우크라이나 국기가 보이는 자포라자의 외곽에 내려줬다. 여행 중 아무 말도 하지 않던 해당 운전사가 자포리자 도착 후 그에게 1000흐리우냐(약 5만 원)을 주며 “행운을 빈다”고 했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페딘 씨는 자포리자 도착 후 자원봉사자로 가득 찬 텐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자신이 마리우폴에서 왔다고 소개하자 텐트 내 모든 사람이 자신을 쳐다봤으며 “영광의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이채완 기자 chaewa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