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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5·18 당시 계엄군에 찔렸다 빼앗은 대검 42년만에 공개

입력 | 2022-05-16 03:00:00

전남 영암서 광주 향하던 강대현 씨
곤욕 치를까봐 숨겨… 5·18재단 기증
“살기 위해 한 행동… 비극 없어야”



강대현 씨가 15일 전남 영암의 한 커피숍에서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 대검에 찔렸던 상황을 회상하고 있다. 강 씨의 등에는 대검으로 인한 흉터(폭 2cm)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영암=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1980년 5월 23일 강대현 씨(61)는 전남 영암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광주로 올라왔다. “시민들이 계엄군에 희생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힘을 보태고 싶었다. 해질 무렵 그는 계엄군을 피해 광주 남구 송암동 철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광주대 인근에 도착했을 때 뭔가에 등이 찔리는 느낌이 들었다. 피를 흘리며 넘어졌는데 계엄군 1명이 다가와 소총에 장착한 대검으로 다시 찌르려 했다. 살기 위해 철길에 있던 자갈로 계엄군을 때리자 ‘아이고’ 하며 쓰러졌다.

강 씨는 총을 빼앗았지만 차마 계엄군을 찌르진 못했다. 개머리판으로 옆구리를 1차례 때린 후 발로 2∼3차례 걷어찼다. 20∼30m 떨어져 있던 다른 계엄군들이 다가오자 총은 멀리 던지고 대검만 챙겨 달아났다. 다행히 대검에 빗맞아 경상에 그쳤다. 강 씨는 인근 마을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자 영암 집으로 돌아왔다.

5·18기념재단은 강 씨가 보관해오던 이 대검을 최근 기증했다고 15일 밝혔다. 행방불명을 제외한 5·18 사망자 166명 가운데 최소 11명이 대검 자상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시민을 찌른 계엄군의 대검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강 씨는 학생들이 1980년 5월 21일 버스를 타고 내려와 “광주 사람들 다 죽어 가는데 영암 사람들은 보고만 있냐”고 호소하자 합류했다고 했다. 강 씨를 비롯한 청년들은 인근 해남군 계곡면 파출소 무기고에서 소총을 챙겼다. 5월 22일 “시민들을 구하겠다”며 광주로 올라왔지만 시내에 진입하지 못했다.

계엄군은 당시 광주 외곽 봉쇄작전을 벌여 송암동을 비롯해 동구 주남마을, 광주교도소 도로에서 통행 차량에 무차별 사격을 하고 있었다. 청년들은 광주 진입이 실패하자 포기하고 해산했고 소총도 반환했다. 강 씨는 해산 다음 날인 23일 혼자 다시 광주로 진입하려다 대검에 찔렸다.

강 씨는 광주에서 돌아온 직후 영암파출소에 끌려갔다. 경찰관들이 “데모에 참여한 걸 자백하라”며 강 씨를 폭행했지만 이웃에 살던 경찰관이 말려 준 덕분에 풀려날 수 있었다. 대검은 신문지에 싸서 장롱 위에 숨겨놨다. 강 씨는 “괜히 꺼냈다가 곤욕을 치를 것 같아 겁이 났다”고 했다.

강 씨는 이후 육군 병장으로 군 복무를 마친 뒤 병원 직원, 개인택시 운전사 등으로 일했다. 현재는 교육기관을 운영하고 있다. 강 씨는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계엄군을 때렸지만 항상 미안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면서 “다시는 5·18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영암=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