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구 기자의 對話]이봉주 전 마라토너
병마에도 불구하고 이봉주는 인터뷰 내내 무척 쾌활했다. 그는 “제가 아프다 보니 몸이 불편한 분들의 어려움을 더 피부로 느끼고 있다”며 “자원봉사자분들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많은데 더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실례지만 몸은 좀 어떠신지요.
“2년 정도 됐는데 큰 차이는 없는 것 같아요. 단지 한참 안 좋았을 때는 통증 때문에 약을 먹지 않으면 잘 수가 없었는데 그래도 지금은 끊은 상태죠.” (약이라면 수면제를 말하는 건가요.) “네. 배 쪽에 있는 근육이 계속 잡아당기다 보니 허리를 펴기 힘들어요. 누우면 고개가 들리기 때문에 지금도 똑바로 누워서 자지는 못하지요. 그래서 옆으로 누워서….” (지난해 6시간에 걸쳐 수술을 받았는데….) “수술은 받았는데 그렇게 크게 나아진 것 같지는 않아요. 그래서 지금은 좀 다른 치료를 받고 있어요.”
―투병 중인데도 작년, 올해 장애인의 날(4월 20일)에 봉사활동을 갔더군요.
“봉주르 원주봉사단이라고 아내가 전에 살던 원주에서 동갑내기들과 마라톤 동호회를 만들었는데 그 동호회에서 봉사활동도 하고 있어요. 전에는 거의 매주 갔는데 아픈 뒤에는 자주 못 가 미안하죠. 제가 아파 보니 몸이 불편하다는 게 어떤 건지 더 피부로 와닿더라고요.” (본인도 아픈데… 원래 낙천적인가요.) “하하하, 울고 인상 쓴다고 낫는 것도 아니잖아요? 마라톤을 한 게 병을 이겨내는 데 도움도 되는 것 같아요.”
―어떤 부분이 그렇습니까.
“선수 시절 기자분들이 가장 많이 한 질문이 ‘인생과 마라톤의 공통점이 뭐라고 생각하느냐’였어요.” (뭐라고 했습니까.) “20∼30대 때 인생이 뭔지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기억도 안 나요. 이제 나이가 들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마라토너는 1∼3등이 결정돼도, 이미 자신의 기록 경신에 실패한 후라도 레이스를 멈추지 않아요. 모든 것이 결정되고, 몸은 천근만근이 되고, 이제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순간이 와도 끝까지 달리지요. 순위와 관계없이 모두가 자신만의 마라톤을 완성해야 하니까요.”
“등수와 기록이 전부라면 금메달이 결정되고, 기록 경신에 실패한 순간 레이스를 멈춰야겠지요. 하지만 그런 마라토너는 없어요. 살면서 우리는 수많은 작은 일을 만나죠. 그 작은 일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하고 그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꼈다면 좋은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거예요. 마라토너에게는 레이스 하나하나가 그 작은 일들이고, 완주는 그 싸움에서 자신을 완성해 나가는 과정이에요. 저는 마라톤의 진정한 승자는 1등이 아니라 완주자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지금도 힘들지만 저를 사랑해주고,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아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이봉주가 태극기를 들고 트랙을 돌고 있다.
“사실 은메달도 굉장히 잘한 건데 우리는 금메달을 못 따면 선수 자신이 마치 큰 죄를 진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울먹이고 그랬잖아요. 죄송하다고…. 하지만 저는 그때 진짜로 굉장히 기뻤어요. 잘한 거잖아요. 그래서 1등을 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투과네에게 축하한다고 하고, 저도 태극기 들고 트랙을 돌았는데… 사실 다른 이유도 좀 있긴 했죠. 그때 동메달이라도 못 따면 군대 가야 했거든요. 더 이상 연기할 수 없을 정도로 미뤄서….” (아까 등수는 중요하지 않다고….) “스물여섯 살 때라… 하하하.”
―지금 생각하면 어떻습니까. 올림픽 금은 의미가 다른데요.
“아쉬운 게 없지는 않지만 그때 금메달을 못 땄기 때문에 오히려 더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 은메달이었기 때문에 금메달이라는 목표를 향해 계속 달릴 수 있었거든요. 제가 44번 출전해 41번을 완주했는데 만약 애틀랜타에서 금을 땄다면 은퇴 시기가 더 빨랐을지도 몰라요. 적어도 40번이 넘게 출전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마라톤은 대회 준비에 3∼4개월 정도 걸리기 때문에 1년에 두 번 이상 나가기 힘들어요. 정말 많아야 3번? 에너지를 많이 쓰기 때문에 휴식도 필요하고요. 훈련에 들어가면 매일 20∼40km를 뛰지요. 40번이면 20년을 매년 출전한 셈이니까 몸 관리가 쉬운 일은 아니죠. 일찌감치 금메달을 땄으면 그렇게 오랜 시간을 버티기 힘들었을 거예요. 전 대리운전도 부른 적이 없거든요.” (술을 안 합니까?) “마시기는 하지만 차를 두고 갔다가 새벽에 해장 마라톤 겸 뛰어서 찾으러 가요. 어차피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두 시간씩 뛰니까 코스만 조금 바꾸면 되니까요. 신혼여행에도 운동화와 유니폼을 가져갔는데요 뭐.”
―설마 진짜 뛰지는….
“운동화, 유니폼, 건강식을 챙겨 가니까 아내가 놀라기는 하더라고요. 일주일간 유럽을 돌았는데 낮에 관광하면서 새벽에 뛸 코스를 봤어요. 파리에서는 에펠탑 근처를 뛰었고요.”
―그래도 사람이니까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겠지요.
“누가 넘어뜨려 주지 않나 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을 때도 있고, 슬럼프도 있고….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은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했던 대회였는데 레이스 중 다른 선수들과 부딪히는 바람에 24등에 그치기도 했죠. 사람들이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를 많이 묻는데 저는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어요. 그런 행복한 기분은 마음이 편하고 여유가 있어야 나오는데 경기 중에는 집중하느라 풍경도 눈에 잘 안 들어오거든요.”
※러너스 하이=고통을 참고 계속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찾아오는 행복감.
―정신력은 그렇다 치고 평발은 어떻게 극복한 겁니까. 무척 아팠을 텐데요.
“사실 제가 평발이란 것도 서울시청팀에 들어가서야 알았어요. 그 전에는 ‘좀 불편한데?’ 정도로만 생각했지요. 그런데 얼마 전에 큰아이가 신체검사 받는 데 함께 갔는데 되게 좋아하더라고요.” (혹시?) “하하하, 저한테 너무 고맙다고 하더군요. 발 때문에 공익근무요원(사회복무요원)이 됐다고요.”
―초등학교 때 운동회에서 상 한번 못 탔다는 건 진짜입니까.
“정말 한 번도 운동회 100m에서 3등 안에 들어온 적이 없어요. 순간적으로 튀어 나가는 단거리는 일반인보다도 느려요. 오죽하면 아들 운동회 학부모 100m에서 간신히 3등을 했겠어요.” (최근 일입니까?) “아니요, 2009년 은퇴하고 이듬해죠.” (선수 출신이라 봐준 건가요.) “애들이 보고 있어서 진짜 전력으로 달렸어요. 1, 2등 하신 분들은 뿌듯했을 거예요. 보스턴 마라톤 우승자인 이봉주를 이겼으니까. 하하하.”
―당신이 세운 한국 신기록이 22년이 지나도록 안 깨지고 있더군요.
“시대가 변해서 그런지 이제는 마라톤같이 힘든 운동은 안 하려는 것 같아요. 저 때는 학교마다 육상부가 있었는데 이제는 많지 않아요. 중고교 선수들을 위한 대회도 많이 없어졌고요. 그리고 선수들도 국제대회 우승이나 신기록 같은 큰 목표보다 국내 대회 순위 경쟁에 더 신경을 쓰는 것 같고요. 기록 단축은 굉장히 힘든 자신과의 싸움이에요. 하지만 국내에서 등수 경쟁만 하면 상대적으로 편하거든요.” (선수라면 다들 올림픽 같은 큰 대회에서 우승하고 싶어 하는 줄 알았습니다.) “요즘은 그런 큰 꿈을 잘 안 갖는 것 같아요. 그리고 마라톤 실업팀 대부분이 시·군·도청팀이라 전국체전, 도민체전에 더 신경을 쓰는 탓도 있지요. 빨리 제 기록이 깨져야 하는데….”
※현재 한국 신기록은 그가 2000년 도쿄 국제마라톤에서 세운 2시간7분20초다.
―지도자의 길을 안 간 이유가 있습니까.
“그게… 시기를 좀 놓친 것 같아요. 은퇴 직전에 소속사에서 지도자 수업을 제의했는데 그때는 당분간 쉬고 싶었거든요. 그동안 가족과 많은 시간을 갖지 못한 게 아쉬웠는데 코치가 되면 또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많아질 수밖에 없고요.” (지금도 가능하지 않습니까.) “신생팀을 맡아서 키워 보고는 싶어요. 그게 아니라도 인기 종목에 가려진 육상이라는 길을 선택한 후배들을 돕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라도 하려고 해요.”
이진구 기자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