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르비우 유적지 르포] 구시가지 전체가 세계문화유산… “우크라의 정신적-문화적 수도” 성당엔 철판, 조각상엔 모래주머니… 러 미사일 공격 대비해 둘러싸 젤렌스키 “문화유산 200곳 파괴돼”… 우크라, 유네스코에 “러 지위 박탈을”
“우리를 지켜주세요”… 예수상에 기도하는 우크라 시민 15일 폴란드와 접한 우크라이나 서부 르비우 중심가의 성안드레아 교회 앞에 있는 성모마리아탑 앞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상’이 설치되고 있다. 러시아의 침공으로부터 우크라이나를 지켜달라는 의미다. 시민들이 예수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다. 르비우=김윤종 특파원 zozo@donga.com
르비우=김윤종 특파원
“‘앉아 있는 예수상’은 숨겨 놓았습니다. 세계에 2개만 존재하거든요. 현재 정확한 소재는 몇 명 말고는 모릅니다.”
15일 우크라이나 서부 르비우시 중심 대성당 광장에 있는 보임 예배당. 이 지역 건축가인 크리스티나 코라사 씨는 1615년에 지은 예배당 위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예배당 꼭대기에는 원래 고뇌하며 앉아 있는 형상의 예수상(像)이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군 포격을 피해 지하 어딘가로 옮겼다. 우크라이나 민족 정체성을 없애려는 러시아군이 고의로 주요 문화유산을 공격한다는 우려 때문이다.
○ 시민들 “문화유산은 우리 영혼”
우크라이나 서부 갈리치아-볼히니아 왕국(1199∼1349년) 때 생긴 르비우는 구(舊)시가지 120ha(약 36만 평) 전체가 199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그만큼 문화유산도 많다. 이날 기자가 찾은 아르메니아 대성당, 성안드레아 교회를 비롯한 주요 문화유적마다 포격이나 미사일 충격파를 막을 대형 철판이 둘러쳐져 있었다. 시청 일대 예수상, 마리아상, 포세이돈 조각 등 예술품, 18세기 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치 기념탑 같은 조형문화재는 방화재와 완충재로 감싸고 철조망과 모래주머니를 둘렀다.유물 17만여 점을 보관한 국립박물관도 문을 닫았다. 이호르 코잔 박물관장은 “(소장 유물은) 비밀리에 지하 은신처로 모두 옮겼다”고 말했다. 시민들은 문화유산 보호를 위한 후원금도 모았다. 시민 데니스 씨는 “르비우는 우크라이나 민족운동 중심지이자 정신적, 문화적 수도다. 러시아 미사일이 우리 영혼인 문화를 부숴버릴 것 같아 걱정된다”고 말했다.
시민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문화유산만큼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의지가 굳다. 이날도 시민들은 시내 성안드레아 보호 장막 앞에 세운 십자가에 기도했다. 대학생 이라나 씨는 “문화재 전체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거나 숨기면 좋겠다”며 “건축물은 옮길 수도 없어 걱정”이라고 했다. 르비우시는 “파괴될 경우 복원을 위해 3차원(3D) 스캐닝, 정밀사진 데이터베이스를 축적하고 있다”고 밝혔다.
○ 러시아의 ‘문화 말살 정책’ 의혹
우크라이나 서부 르비우 보임 예배당 꼭대기에 있던 ‘앉아 있는 예수상’.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후 안전한 예배당 지하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사진 출처 위키백과
러시아군은 집요하게 우크라이나 문화유산을 노린다. 6일 북부 하르키우시 국립문학기념관이 포격으로 파괴됐다. 러시아군은 남동부 마리우폴의 박물관에서 주요 문화재 수백 점을 약탈했다. 18세기 문화운동을 주도한 철학자 흐리호리 스코보로다 자택, 민속화가 마리야 프리마첸코 작품도 파괴 또는 훼손됐다. 동부 루한스크에서는 종교문화재 건물 7동이 무너졌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7일 대국민 연설에서 “러시아 침공 이후 우크라이나 문화유산 200곳이 파괴됐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유산과 역사, 정체성을 지워버리려고 한다”고 비판했다. 1954년 헤이그 협약, 2017년 유엔 안보리 결의안에 따라 문화유산 공격 행위는 전쟁범죄다. 국제형사재판소(ICC)도 고의적인 문화재 파괴범에게는 징역형을 선고하고 있다. 라자르 엘룬두 아소모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 국장은 “자국 문화가 사라질 위험에 처한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의 유네스코 회원국 지위를 박탈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