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니스 안티포우 씨. 줄리아 스물리악 씨 제공
한국 무역회사에서 일하는 줄리아 스물리악 씨(34)는 얼마 전까지 우크라이나에서 도착할 편지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오랜 친구 데니스 안티포우 씨(33)가 보낼 것이었다. 안티포우 씨는 이달 초 “생일 축하 편지를 보냈다”며 줄리아에게 편지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링크와 운송장 번호를 알려줬다. 무슨 내용이냐고 묻자 안티포우 씨는 “서프라이즈(surprise)”라고만 답했다. 줄리아는 “생일에 딱 맞춰 오겠다”며 즐거워했다.
하지만 안티포우 씨 편지보다 그의 부고(訃告)가 먼저 도착했다. 안티포우 씨는 11일 소속 부대가 러시아군 공습을 받아 숨을 거뒀다. 줄리아는 생일을 맞은 오늘(18일)도 ‘유서’가 돼버린 친구의 편지를 기다리고 있다.
둘은 우크라이나 수도에 있는 키이우 대학교 한국어과 선후배로 만났다. 안티포우 씨는 2008년 서울대로 교환학생을 올 만큼 한국을 사랑했다. 그는 한국외국어대에서 한국어지도자 과정을 이수한 뒤 키이우대에서 한국어 강사로 일했다.
한국에서 공부하던 안티포우 씨와 유학생 친구들. 줄리아 스물리악 씨 제공
2014년 우크라이나 친(親)러시아 정부에 반대하는 민주화 시위(유로마이단 혁명)에 적극 참여한 안티포우 씨는 러시아가 크름반도를 무력으로 강제 병합하자 우크라이나군에 자원했다. 공군에서 특수 드론(공중무인기) 조종술을 배운 그는 이듬해 동부 돈바스 전선 특수작전에 참여해 친러 분리주의자 반군 세력과 교전을 벌였다. 지구에서 가장 큰 항공기 ‘므리야’(우크라이나 전쟁 초기 파괴) 조종사 아버지를 둔 안티포우 씨는 우크라이나를 사랑했고 자부심도 남달랐다.
조종석의 안티포우 씨. 줄리아 스물리악 씨 제공
돈바스 전선에서 1년간 복무하고 제대한 그는 일상으로 복귀한 참전용사들이 직업을 구하도록 돕는 사업을 군대 동료들과 시작했다. 지난해에는 미국 국무부의 우크라이나 청년사업가 리더십 프로그램에 선발돼 미국 연수를 했다. 지난해 11월 우크라이나로 돌아온 그는 사업가로서 새로운 미래를 그리던 참이었다.
미국 연수 중 수도 워싱턴을 찾은 안티포우 씨. 줄리아 스물리악 씨 제공
하지만 올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하자 그는 다시 군에 입대했다.
2015년과 올해 군 복무 중인 안티포우 씨. 줄리아 스물리악 씨 제공
3월 9일 그는 러시아군 폭격에 뇌진탕을 비롯해 크게 다쳐 두 달 가까이 병원 신세를 졌다. 폭격 충격파 때문에 공중으로 날아올랐을 때 하얀 섬광을 봤다는 그는 죽는 줄만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안티포우 씨는 “의식을 찾고 팔다리가 제자리에 있는 걸 확인한 뒤 안전한 곳으로 대피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었다”며 “죽은 줄 알았는데 다시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된 느낌이 대단했다. 어제가 내 두 번째 생일”이라며 줄리아에게 말했다.
3월 러시아군 폭격 직후 안티포우 씨. 줄리아 스물리악 씨 제공
안티포우 씨는 두 달 가까운 입원 기간에도 한국 방송사를 포함해 세계 각국 뉴스에 출연하며 우크라이나 전황을 알렸다. 그는 “몸만 나으면 바로 돌아가 싸우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줄리아는 그가 회복할 때 쯤 전쟁이 끝나 전쟁터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기를 바랐다. 안티포우 씨도 친구들에게 전쟁에서 승리해 기쁨을 함께 나누겠다고 약속했다.
병원의 안티포우 씨. 줄리아 스물리악 씨 제공
이달 초 안티포우 씨는 허리가 여전히 아팠지만 서둘러 퇴원해 부대로 복귀했다. 그는 친구들에게 “무거운 것 들 때만 아프니 괜찮다”고 말했다. 하지만 두 번째 폭격에서는 살아남지 못했다. 줄리아는 우크라이나와 한국을 남달리 사랑한 친구를 많은 이들이 기억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매주 일요일 서울 중구 러시아대사관 앞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이 여는 반전-러시아 규탄 집회에 참석한 줄리아(가운데)와 그의 자녀들. 줄리아 스물리악 씨 제공
임보미 기자 b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