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를 영화로 읊다]〈38〉복수는 나의 것〈2〉
영화 ‘영웅’에서 무명(왼쪽)은 진시황 암살을 시도하지만 천하통일을 위해 그를 살려준다.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제공
형가의 진시황 암살 미수 사건은 한시와 영화에서 다양하게 변주된다. 장이머우 감독은 ‘영웅’(2002년)에서 이 사건을 새롭게 형상화했다. 조선 시인 정두경(鄭斗卿·1597∼1673)은 협객을 읊은 시를 많이 남겼는데, 형가의 일을 색다른 방식으로 포착했다.
시의 첫머리에 ‘유주의 말 탄 이민족 협객’이 등장한다. 본래 당나라 이백의 시에 나오는 인물로 형가와는 관련이 없다.(‘幽州胡馬客歌’) 형가는 암살을 함께 결행할 동지를 기다렸다고 하는데, 그가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사기 ‘자객열전’) 그럼에도 시인은 형가가 기다린 이가 바로 이 사람이라고 강조한다.
당시 병자·정묘호란의 치욕에 분노하던 지식인들은 형가에 감정을 이입해 청나라에 대한 설욕 의식을 드러내곤 했다. 척화파 조경(趙絅)은 형가가 기다리던 이와 함께 결행하지 못해 거사가 실패했다고 읊기도 했다.(‘荊軻’)
영화에서도 형가를 연상시키는 무명(리롄제·李連杰)이라는 인물이 다른 자객들의 도움을 받아 진시황을 노린다. 한시가 이백의 시에서 읊은 협객을 끌어와 사건을 각색했다면 영화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1950년)에 나온 방식(한 사건을 각자 입장에 따라 다르게 해석)을 활용해 같은 사건을 각각 다른 세 이야기로 전개한다. 또 한시가 길고 짧은 구절을 섞거나 어순의 도치를 활용한 것처럼, 영화도 색채상징과 좌우대칭을 강조한 화면을 통해 표현미를 극대화한다.
영화는 주인공이 진시황의 천하통일을 위해 복수를 스스로 포기했기에 영웅이라고 강변한다. 진시황에 투사된 신중화주의가 자객의 서사로 포장된 듯하다. 하지만 한시는 복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는다. 시인은 도연명의 시 중 형가를 읊은 시(‘영荊軻’)를 특히 좋아했다. 도연명처럼 시인 역시 복수를 꿈꿨던 것일까. 형가를 호명하는 방식을 통해 호란의 참혹한 패배로 내상을 입은 당시 지식인의 내면을 엿볼 수 있다.
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