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카치오의 서사시 ‘테세이다’의 삽화
라의숙 패션칼럼니스트
2년 넘게 이어진 팬데믹 세상은 왠지 중세를 떠올리게 한다. 의술이 발달한 현대에도 이렇게 불안한데, 흑사병으로 속절없이 환자가 죽어나간 중세의 공포는 상상 이상일 것이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어두웠다. 여성과 어린이는 제대로 사람대접도 못 받았고, 교회의 허락 없이는 남녀 간 사랑도 못 했다. 설상가상 기나긴 전쟁으로 사람들은 피폐해져 갔다. 이런 와중에도 직물산업은 동방과 빈번한 무역 덕분에 큰 발전을 이뤘다.
보카치오의 서사시 ‘테세이다’의 삽화는 당시 옷 문화를 잘 보여준다. 사촌지간인 아르시테와 팔라몬이 아테네 왕의 처제인 에밀리아를 동시에 사랑한다. 에밀리아를 두고 벌인 사랑의 시합에서 아르시테가 승리한다. 한데 아르시테에게 사랑을 느낀 여신 비너스가 질투에 눈이 멀어 그에게 치명적 부상을 입히고, 아르시테는 결국 죽음을 맞는다. 이 삽화는 시합 전 신전 기둥 아래서 반쯤 일어나 기도를 올리는 아르시테, 에밀리아, 팔라몬(왼쪽부터)을 그린 것이다.
지금은 마른 체형이 인기지만 당시엔 급속한 인구 감소 영향으로 다산을 뜻하는 둥글게 나온 배가 사랑을 받았다. 이런 체형에 어울리도록 여성복은 주름이 풍성하게 들어가고 길이가 길어졌다. 머리엔 지위에 따라 높이를 달리 한 고깔모자 ‘에냉’을 썼다. 긴 것은 길이가 4피트(약 1.2m)나 됐다. 남성들은 엉덩이까지 오는 튜닉을 입고 딱 달라붙는 바지 형태인 ‘쇼스’를 입었다. 여성들이 에냉을 썼다면 남성들은 신발 앞코를 뾰족하고 긴 탑 모양으로 만들어 신분을 과시했다.
중세 후기의 패션은 한마디로 신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인간의 염원을 담았다. 그래서 길고 뾰족한 것이 특징이다. 신을 강조한 중세 문화는 인간적인 냄새가 없이 차가웠다. 사람들은 세상사가 버거울수록 종교에 더 매달렸고, 패션도 비슷한 흐름을 따랐다.
중세 패션이 고통에 대한 답을 종교에서 찾으려 했다면 팬데믹을 겪은 요즘 패션은 어디서 돌파구를 찾았을까. 지난 2년여간 패션은 갇혀 지내는 답답함과 어두운 사회 분위기를 벗어나려는 듯 자유분방한 ‘믹스 앤드 매치 룩’을 다시 불러냈다. 20년 전 유행했던 골반바지와 짧은 상의를 매치한 스타일이 사랑받고 있다. 단절 속에서 맞이한 외로움은 과거의 ‘행복한 한때’를 소환하기도 했다. 대중문화가 번성했던 2000년대 초 화려하고 대담한 ‘Y2K패션’도 유행하고 있다. 중세 그림 속 패션이 신의 사랑만을 갈구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담고 있다면, 요즘 패션은 기죽지 않고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인간의 에너지를 표출하고 있는 셈이다.
라의숙 패션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