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학자가 본 ‘식물의 가족’
신혜우 식물학자·과학 일러스트레이터
《“식물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식물학자인 필자에게 사람들이 하는 흔한 질문이다. 그런데 사실 그때마다 말문이 막힌다. 사실 ‘식물’은 단순히 공통된 하나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많은 식물 종을 통틀어 ‘식물’이라 말하지만, ‘식물’은 식물계에 속하는 모든 종의 총칭이다.
우리는 학창 시절에 배운다. 생물 분류계급은 ‘종속과목강문계’ 단계로 나뉜다. 인간에게 이를 대입해 보면 호모사피엔스, 즉 사람이라는 종은 사람속, 사람과, 영장목, 포유강, 척삭동물문, 동물계에 속한다. 황인, 백인 등 생김새가 다양해도 모두 호모사피엔스 한 종이다. 동물계에는 현재 700만 종 이상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카네이션과 패랭이꽃은 가족
가족과 친척은 서로 닮는다. 이뿐 아니라 사람은 같은 계통인 영장류, 포유동물과도 비슷한 구석이 있다. 생물은 진화를 통해 종으로 분화하면서 유전자를 전달받았기에 계통이 같은 개체는 닮을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피는 못 속인다.
신혜우 식물학자가 그린 식물세밀화 ‘술패랭이’. 신혜우 제공
인간으로 치면 카네이션, 패랭이꽃, 안개꽃(왼쪽부터)은 먼 친척뻘이다. 석죽과 패랭이꽃속에 속하는 카네이션과 패랭이꽃은 모두 가장자리가 지그재그로 잘린 데다 대체로 분홍빛을 띤다. 석죽과에 속하는 안개꽃도 확대해서 보면 줄기 마디에서 마주나는 잎과 지그재그 가장자리 등이 카네이션과 닮았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블룸스바이더박스
혈연관계가 아닌데도 서로 닮은 사람들이 있듯 계통과 상관없이 닮은 식물들도 있다. 새와 곤충이 전혀 가깝지 않음에도 닮은 구조인 날개를 가지는 것과 같은 원리다. 사막에서 보이는 통통한 다육성 선인장은 선인장과가 아니라 대극과 식물인 경우가 많다. 건조한 환경에 물을 저장해 살아남기 위해 계통과 관계없이 그런 삶의 방식을 선택해 다육성 형태를 갖추게 됐다. 완두콩과 포도도 각각 콩과와 포도과로 계통적으로 멀지만 둘 다 덩굴손을 지녔다.
식물가족의 번창과 멸문
패랭이꽃속에는 카네이션 외에도 340여 종이 있다. 패랭이꽃속이 속한 석죽과에 속한 식물은 2000여 종에 이른다. 카네이션이 뿌리를 둔 가문은 꽤 번창한 셈이다. 이처럼 식물도 사람처럼 가족 규모가 다른데, 꽃이 피는 식물 중 가장 번창한 과로는 국화과와 난초과가 꼽힌다. 1, 2위를 다투는 이들 과에는 2만2000∼2만3000여 종이 있다. 반면 멸문에 가까운 식물도 있다. 은행나무 한 종밖에 남아 있지 않은 은행나뭇과가 대표적이다.
식물의 번창과 멸문은 지구 환경 변화에 얼마나 잘 적응하며 진화했느냐에 좌우된다.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면 개체가 사라지지만, 빠르게 적응하면 새로운 종으로 분화하며 번창하는 것이다. 은행나무는 중생대에 출현한 겉씨식물 중 지금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식물이다. 처음엔 은행나무속 외에도 10속 정도가 있었고, 그 속에 여러 종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지금은 은행나무 한 종 외엔 모두 사라져 화석으로만 존재한다.
사실 식물계에선 인간의 개입으로 진즉 혈연가족의 개념이 깨졌는지도 모른다. 카네이션은 2000년 넘게 세계 곳곳에서 원예품종으로 개발됐다. 자연히 원산지와 교배한 야생 패랭이꽃종을 정확히 알기 어렵다다. 특히 파란색 계열의 카네이션은 자연의 법칙을 완전히 거스른 품종이다. 파란색을 내는 색소를 만들 유전자가 없는 패랭이꽃속 식물은 파란 꽃을 피울 수 없다. 파란색 카네이션은 인간이 가짓과와 질경잇과 등의 유전자를 카네이션에 넣어 인위적으로 만든 결과물이다. 사람으로 치면, 도마뱀의 유전자를 인간의 몸에 넣어 비늘을 만든 셈이다. 이처럼 자연의 법칙을 깨고 인간이 만들어낸 근원을 알 수 없는 식물이 적지 않다.
‘지구 가족’의 가치 고민할 때
2018년 지구에 사는 생물량의 변화를 분석한 한 논문을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생물의 크기와 무게는 다양한데 이 논문에서는 각 종을 하나의 큰 덩어리로 계산해 종별 무게를 비교했다. 그 결과 지구에 사는 포유류 중 60%가 가축이고 36%가 인간이었다. 야생 포유류는 단 4%밖에 남지 않았다. 인간의 자연 훼손으로 지구상 생물종들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강인한 생명력으로 생존해온 식물도 인간의 탐욕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인간이 환경을 파괴하는 속도는 어마어마하고 그것을 견뎌 자연적으로 번창할 수 있는 생물은 거의 없다. 집에서 키우는 식물을 ‘반려식물’이라 부르며 가족 구성원으로 여기는 요즘, 지구라는 공간을 공유하는 ‘지구 가족’의 개념을 생각해본다. 필요에 따라 유전자 조작을 서슴지 않으며 동물과 식물을 이용하기보다 이들 모두를 껴안는 가족의 가치를 고민해볼 때가 아닐까. 지구라는 공간을 공유하는 생물의 소중함, 더 넓은 가족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좋겠다.
신혜우 식물학자·과학 일러스트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