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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채꽃 필 무렵 그 바다에 달이 뜨면… 어디선가 고고한 학 울음소리

입력 | 2022-05-21 03:00:00

[여행이야기]꽃과 학의 고장 전남 장흥
유채꽃 흐드러진 ‘천년학’의 마을
예술적 영감 부르는 봉우리들



소설가 이청준의 ‘선학동 나그네’를 원작으로 한 영화 ‘천년학’의 무대인 전남 장흥군 선학동 유채마을. 노란 유채밭과 옹기종기 들어선 마을, 그리고 마을 앞 득량만의 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굳이 산을 타지 않아도 산을 감상하는 맛이 나는 곳이 있다. 전남 장흥에서는 비상하는 학의 형상을 한 산, 묵직한 산세가 위풍당당하게 보이는 사자산, 정상에 멋진 바위 관을 두른 임금 산 등을 가까이에서 즐길 수 있다. 빼어난 산의 형상과 함께 양념처럼 버무려진 스토리는 여행의 맛을 더해준다. 이청준, 한승원, 송기숙 등 필담 좋은 소설가들을 유독 많이 배출한 문인의 고장답다. 어디 그뿐이랴.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갑오징어, 키조개 등 싱싱한 횟감은 봄철 입맛까지 북돋워준다.》





○‘천년학’의 무대, 선학동 유채마을

선학동 마을은 학(가운데 높은 산)이 양 날개를 활짝 펼친 가운데로 아늑하게 들어선 선학형(仙鶴形)을 이루고 있다.

전남 장흥군 득량만의 작은 포구. 바닷가 마을은 물이 차오르고 달이 뜰 때면 서양의 늑대인간 변신 전설처럼 모습이 확 바뀐다. 마을 뒷산인 관음봉은 양 날개를 활짝 펼친 학의 모습으로 수면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마을은 변신한 학의 품에 포근히 안긴 형상이 된다. 이 마을이 선학동(仙鶴洞)으로 불리게 된 배경이다.

선학동에서 2.5km가량 떨어진 진목마을에서 태어난 소설가 이청준이 이 마을의 풍광을 보고 스토리를 불어넣었다. 그는 ‘선학동 나그네’라는 소설을 발표했다. 선학동에 밀물이 차고 산이 학으로 변신할 무렵, 남도의 소리꾼인 늙은 아비가 눈먼 어린 딸을 이곳으로 데리고 와 소리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어느덧 소리꾼 부녀가 날아오르는 듯한 학과 함께 소리를 하게 되자 선학이 소리를 불러내는 것인지, 소리가 선학을 날게 하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경계에 이른다. 이른바 득음(得音)의 경지다.

목적을 이룬 부녀는 마을을 떠났다. 이후 포구는 간척사업으로 인해 들판으로 바뀌게 되고, 물을 잃은 관음봉은 더 이상 학으로 변신할 수 없게 됐다. 20년의 세월이 흘러 눈먼 딸이 다시 선학동에 나타났다. 관음봉 명당에 묻어달라는 아비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득음한 딸은 학을 부르는 소리로써 명당을 필사적으로 지키려는 마을 사람들을 홀린 다음 아비 유골을 암장하고 떠났다. 그 대신 마을 사람들에게는 학이 되살아났다는 믿음을 선물처럼 남겨두고서….

선학동과 이웃한 회진면 진목리의 이청준 생가.

실제로 옛 모습을 잃은 선학동은 외지인들이 일부러 찾아오는 명소로 변신했다. 2006년 임권택 영화감독이 ‘선학동 나그네’를 원작으로 삼아 만든 영화 ‘천년학’이 상영되면서부터다. 이 마을 갯가 둑에는 ‘천년학’ 세트장(방앗간 겸 선술집)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촬영한 곳인데, TV드라마 촬영지로 애용되고 있다고 한다.

영화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선학동은 이후 유채마을로 더욱 유명해지고 있다. 마을 주변 논밭과 산자락이 봄만 되면 노랗게 물든 유채꽃으로 장관을 이룬다. 유채꽃밭은 30분 정도면 다 돌아볼 수 있는 규모인데, 길이 산책하기 좋도록 잘 다듬어져 있고 중간에 쉬어 갈 수 있는 정자도 마련돼 있다. 정자에서 바라보면 유채꽃밭이 득량만의 쪽빛 바다와 어울려 몽환적인 풍경을 빚어낸다.




○장흥 지키는 스핑크스 산

바위가 제(帝) 모양을 하고 있는 제암산 정상의 임금바위.

장흥 남쪽 선학동이 노란 유채꽃으로 사람들을 유혹할 무렵이면 북쪽 제암산(807m) 능선에서는 철쭉이 진분홍빛으로 세상을 물들이고 있다. 바로 제암산 곰재 능선을 중심으로 펼쳐진 철쭉평원이다. 곰재 능선에서 간재삼거리를 거쳐 사자산까지 이어지는 평원에는 30년 수령의 철쭉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4월 하순부터 5월 중순까지 펼쳐지는 진분홍빛 꽃밭 길을 거닐다 보면 이곳이 ‘천상의 화원’이라고 불린다는 데 절로 고개가 끄덕거려진다. 올해는 철쭉이 일찍 만개해 지금 방문하면 진하디진한 꽃빛깔을 놓친 아쉬움이 있을 수 있지만, 주변 경관이 충분히 보상해준다.

산책하는 기분으로 곰재 능선까지 걸어서 올라가면 북쪽으로 1.5km 남짓 떨어진 거리에 제암산의 정상이 보인다. 정상은 임금 제(帝)자 모양의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높이가 30m 정도 되는 바위가 3단 형태로 서 있는데, 널찍한 바위 꼭대기는 수십 명이 너끈히 한자리에 앉을 수 있는 크기다.

이 바위를 향해 주변의 기기묘묘한 형상의 바위들과 봉우리들이 공손히 절을 하고 있는 듯한 모습도 인상적이다. 그래서 이 바위를 임금바위, 즉 제암(帝巖)이라고 부른다. 천기(天氣)가 뭉친 바위는 신령한 기운이 가득 차 있는 듯하다. 이곳 사람들은 이 바위를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라는 의미로 ‘제암단’이라고 부른다. 가뭄 때면 바위 기운에 기대 비를 불러들이기 위해서 기우제를 지냈기 때문이다.

곰재 능선에서 남쪽으로 바라보이는 사자산(666m)도 빼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다. 사자산은 제암산, 억불산과 함께 장흥의 삼산(三山)으로 불린다. 사자산은 위엄 서린 표정으로 장흥읍을 굽어보고 있는 형상이어서 ‘장흥을 지키는 스핑크스’라고 불리기도 하고, 일제강점기엔 일본 후지(富士)산을 빼닮았다고 해서 일본인들 사이에 ‘장흥 후지산’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사자산은 산 아래에서는 방향에 따라 여러 형상으로 보이지만, 곰재 능선에서 바라보면 우람한 사자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난다. 정상 서쪽의 사자 머리(사자두봉)에서 능선의 사자 등을 따라 사자 꼬리(사자미봉) 모습이 펼쳐지는데 마치 사자가 하늘을 우러러보는 듯한 모습이다. 사자두봉에는 산신제를 올리는 큰 바위가 제단처럼 마련돼 있고, 가을에는 사자 갈퀴처럼 산등성이가 누런 억새로 우거져 더욱 장관을 이룬다.

결과적으로 곰재 능선에서는 철쭉 축제를 즐기면서도 북쪽의 임금바위와 남쪽의 사자산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기(氣) 체험 스폿(spot)’이 되는 셈이다.




○피톤치드 향과 장흥삼합 건강식

억불산 자락 ‘정남진 편백숲 우드랜드’에 있는 한옥.

북쪽 제암산과 남쪽 선학동 중간 지점에 있는 천관산 역시 정상에 솟은 특이한 바위들로 명산의 반열에 오른 산이다. 여기저기 늘어선 여러 기의 입석(立石)들이 마치 머리에 쓰는 관처럼 보인다.

천관산은 하늘을 찌를 듯 솟은 봉우리들과 바위들이 불꽃 형상으로도 보인다. 동양의 음양오행론으로 분류하면 화(火) 기운이 강한 산에 해당한다. 이러한 산은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런 기운 때문일까, 문단에 정식으로 등단한 장흥 출신 문인만 60명이 넘는다. 천관산 기슭에는 이를 기념하는 천관문학관(대덕읍 천관산문학길 301)이 있다. 현대문학의 거장으로 꼽히는 이청준, 한승원 작가를 비롯해 송기숙, 김녹촌, 이승후 등 장흥 출신 작가들의 흔적이 전시돼 있다.

전남 남해에 있는 장흥을 여행하려면 서울 등 수도권에서는 최소 1박 2일은 잡아야 한다. 건강을 고려한 숙박지로는 억불산 자락의 ‘정남진 편백숲 우드랜드’가 있다. 장흥군이 운영 중인 이곳은 통나무주택, 황토주택, 삼나무 한옥 등 건강 체험이 가능한 숙박시설을 갖추고 있다. 이곳은 40년생 이상의 아름드리 편백나무 숲이 조성돼 몸에 좋은 피톤치드가 가득하고, 편백소금찜질방에서는 힐링도 할 수 있다. 물론 예약은 필수다.

장흥의 대표 먹거리 중 하나인 갑오징어.

장흥의 먹거리 또한 건강 보양식으로 즐길 수 있다. 장흥 하면 장흥삼합과 갑오징어를 빼놓을 수 없다. 장흥삼합은 영양소 풍부한 갯벌에서 자란 키조개 관자, 참나무에서 키운 표고버섯, 장흥산 한우가 어우러진 보양 음식이다. 세 가지 음식물이 조화롭게 어울리는 맛이 매우 좋다. 장흥 갑오징어는 신선한 회로 먹거나, 진한 먹물과 함께 먹는 먹찜으로 유명하다. 몸통에 큰 뼈를 가지고 있는 갑오징어는 살이 통통하게 오르는 봄철에 가장 맛있다. 일반 오징어에 비해 식감이 매우 좋아 미식가들의 식단에 자주 오르는데, 약으로도 쓰이는 갑오징어의 먹물과 함께 먹으면 고소함이 배가된다.







글·사진 장흥=안영배 기자·철학 박사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