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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마지막 유희, ‘죽음의 춤’[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입력 | 2022-05-23 03:00:00

〈50〉 죽음과 함께 춤을 추다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이 삶에서 그래도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 좋건 싫건 이 삶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럽 중세의 광장에는 “죽음은 확실하다. 다만 그 시기만 불확실하다”(mors certa hora incerta)라고 적혀 있곤 했다.

죽음은 어쩔 수 없지만, 죽음에 대한 태도는 어쩔 수 있다. 죽음이야 신의 소관이겠지만, 죽음에 대한 입장만큼은 인간의 소관이다. 즐거운 인생을 사는 이에게야 죽음은 더없이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고단한 인생을 사는 이에게는 죽음이 반가운 소식일 수도 있다. 메트니츠 납골당 외벽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산 자들이 당신에게 잘해주지 않았겠죠. 그러나 죽음은 당신에게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요.” 이런 글귀는 사회가 그에게 얼마나 가혹했는지 암시한다.

실로 죽음의 의미는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영원히 살 수 없으니 매 순간 열심히 살아보자고 할 수도 있고, 부, 명예, 권력 같은 세속적 가치가 덧없다고 여길 수도 있고, 어차피 죽는 인생을 쾌락으로 가득 채워 보자고 마음먹을 수도 있고, 현세의 즐거움에 한계가 있다고 깨달을 수도 있다. 스페인 몬세라트 수도원이 소장하고 있는 무도가(舞蹈歌) 필사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우리는 서둘러 죽음을 맞이하러 가네. 더 이상 죄를 범하고 싶지 않아서.”

독일에서 16세기 그려진 작자 미상의 ‘죽음의 춤’ 관련 작품. 죽음을 대상화한 예술 장르인 ‘죽음의 춤’은 삶은 허망하며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해진다는 메시지를 주로 담고 있다. 사진 출처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홈페이지

언젠가는 닥칠 죽음의 체험에 압도당하지 않으려면, 죽음을 ‘대상화’할 필요가 있다. ‘죽음의 춤’(Dance Machabre)이라는 예술 장르는 바로 그런 대상화의 산물이다. 이 장르에 속하는 작품에는 대개 춤추는 해골이 등장한다. 해골은 죽음의 소식을 가져오는 사자(使者)를 의미할 때도 있고, 의인화된 죽음을 나타낼 때도 있다. ‘죽음의 춤’은 유럽 중세 후기에서 크게 유행했지만, 그 이전 시기나 비서구권에도 유사한 그림이나 조각들이 존재한다. 이토록 다양한 작품들에 일관된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다.

16세기 독일 화가 한스 홀바인의 ‘죽음의 춤’ 관련 작품들. 용맹한 기사(왼쪽 사진)도 고귀한 성직자도 죽음을 피해 갈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사진 출처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홈페이지

그래도 자주 반복되는 메시지는 있다. 가장 흔한 것은, 삶이란 결국 허망한 것이라는 메시지다. 그에 못지않게 자주 등장하는 메시지가 평등이다. 살면서 어떤 향락을 누리고, 어떤 고귀한 신분을 가졌든 죽음 앞에서는 모두 같다. 신분 사회에서 이 평등의 메시지는 한층 강렬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한스 홀바인의 작품에 보이는 것처럼, 용맹한 기사나 신실한 성직자도 죽음을 무찌를 수 없다. 16세기 독일 작품에 나타난 것처럼, 신분이 고귀하다고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별개의 인생행로를 걷던 이들이 마침내 하나 되는 길이 바로 죽음이다.

죽음은 왜 춤을 추고 있는가? 죽음의 춤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학자 울리 분덜리히조차도 이 장르에 체계적인 요소는 없다고 단언할 정도이니, 시대를 초월하여 그 춤의 의미를 확정할 수는 없다. 춤에는 주술적 성격이 있으니, 죽음의 춤은 생사가 갖는 비합리성이나 불경함을 뜻할 수도 있다. 죽음이라는 게 슬퍼할 일이 아니라, 춤추며 기뻐할 일이라는 역설적인 의미를 담고 있을 수도 있다. 춤이 동반하는 움직임이란 결국 생명의 표현이니, 마지막 생명의 약동을 나타낸 것인지도 모른다.

이 중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죽음의 춤이 다름 아닌 배움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파리의 생이노상 수도원 벽화에 적힌 대화시(對話詩)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여기에 유한한 인생을 올바르게 마치기 위해/명심할 교훈이 있네/그것은 바로 죽음의 춤/누구나 이 춤을 배워야 하네.” 배워야 한다는 말은 거저 얻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거저 얻어지지는 않지만, 노력하면 얻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점에서 죽음의 춤은 죽기 전에 꼭 배워야 하는 필수과목이다.

그래서일까. 스오 마사유키 감독의 영화 ‘쉘 위 댄스’의 주인공 스기야마는 중년이 되어 느닷없이 춤을 배우기 시작한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나이에 결혼하고, 사회에서 요구하는 대로 자식을 낳고, 사회에서 기대하는 대로 은행 융자를 받아 집 장만을 한 나름 성공적인 직장인 스기야마. 그는 어느 날 사교댄스를 배우기 시작하고, 그러지 않고는 찾지 못했을 자신을 찾게 된다.

이미 중년이 된 스기야마가 춤을 배우는 일은 쉽지 않다. 몸과 마음이 경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규범대로 살아온 그의 마음이 유연할 리 없다. 출퇴근에 급급했던 그의 몸도 유연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춤을 추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이 유연해져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경직이란 과제와 싸워야 한다. 몸이든 마음이든. 죽은 뒤에야 비로소 사후 경직이 찾아온다.

춤에는 흥과 리듬이 필수다. 그뿐이랴. 막춤 아사리판이 아니라, 사교댄스에는 파트너가 필요하다. 파트너란 합을 맞추어야 하는 존재. 파트너와 조화를 이루려면, 어느 정도 정신줄을 놓되 완전히 놓지는 않아야 한다. 춤은 배우기 쉽지 않은 고난도의 예술이지만,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유희이기도 하다. 인생행로에서 봉착하는 모든 것들을 댄스 파트너로 간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죽음의 춤’ 장르에 따르면, 인생의 마지막 댄스 파트너는 다름 아닌 죽음이다. 심신이 유연하다면, 심지어 죽음마저도 유희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겠지.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