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기 마레스케 장군 부부가 자살한 당일 아침 자택 거실에서 함께 찍은 사진(왼쪽 사진). 노기 장군의 할복 이후 그를 신격화하는 광풍이 불었고, 이는 30년 뒤 일본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가미카제에 영향을 끼쳤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한국병합 2년 후인 1912년 7월 30일 60세의 메이지 일왕이 재위 45년 만에 사망했다. 메이지유신,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함께 겪은 일왕의 죽음. 문호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가 ‘마음’에서 “그때 나는 메이지의 정신이 일왕에서 시작하여 일왕으로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라고 쓴 대로, 당시 일본인들은 한 시대가 끝났다는 걸 직감했다. 그런데 석 달 후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육군대장이자 러일전쟁의 국민적 영웅인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장군이 할복자살한 것이다. 일왕의 뒤를 따라간다며. 순사(殉死)였다. 》
일왕 사망하자 부인과 자결
일왕의 장례식 날 저녁 무렵 운구행렬이 궁궐을 빠져 나오던 시각, 노기 마레스케 부부는 자택에 있었다. 당시 63세였던 노기 장군은 육군대장 군복을, 부인은 전통 복을 입고 있었다. 운구가 시작된 걸 확인한 장군은 칼을 빼들어 열십자 모양으로 배를 갈랐다. 부인 시즈코(靜子)도 가슴을 찔러 자결했다. 이 또한 남편의 죽음을 따라간 순사였다. 검시 결과에 따르면 (아마도 남편의 도움으로) 시즈코 부인이 먼저 자결을 감행하고, 이어 노기의 할복이 이뤄진 듯하다. 거실의 사진 속에서 메이지 일왕과 두 명의 아들(모두 러일전쟁에서 전사)이 이 장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본에서 원래 순사는 전사한 주군을 따라 죽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쿠가와 시대에 들어서는 주군이 병들어 죽어도 순사하는 습관이 확산되었다. 예를 들면 1636년 센다이 번주(仙臺藩主)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가 죽자 15명이 순사했고, 노기 장군의 부인처럼 이 순사자들을 따라 죽은 자도 5명 있었다. 누가 봐도 이상한 풍습이었던지 막부는 금지령을 내려 순사하는 자를 오히려 엄벌에 처했다. 그 후 순사는 거의 없어졌다. 그런데 20세기 초 대명천지에, 세계 5대국을 자랑하던 일본에서 할복 순사가 다시 벌어진 것이다.
유서에 남긴 할복 이유는
노기 장군은 러일전쟁의 승부를 가른 뤼순(旅順)전투를 지휘해 러시아 요새를 함락시켰다. 그러나 그 작전은 5개월이나 걸렸고, 6만 명이 넘는 엄청난 사상자를 남겼다. 그의 두 아들도 전사했다. 개선하여 메이지 일왕을 만났을 때, 노기는 대량의 전사자가 난 걸 사죄하며 죽기를 청했다. 메이지 일왕은 지금은 죽을 때가 아니라며, 정 죽겠다면 내가 죽은 다음이라면 허락하겠노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유서에는 다른 할복 이유가 적혀 있다. “제가 이번에 폐하의 뒤를 따라 자살하는 점,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로 시작하는 유서에서, 노기는 1877년 서남전쟁(西南戰爭·사이고 다카모리 지휘하에 사쓰마 군인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던 중, 사쓰마군에게 군기(軍旗)를 빼앗긴 일을 사죄하며, 그 후로 죽을 자리를 찾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이번 일왕의 죽음을 기회로 마음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유서에는 또 두 아들이 전사한 후 주위에서 양자를 들여 가문을 이으라고 간청했지만, 자기는 그럴 생각이 없다며 노기가(乃木家)를 반드시 폐절(廢絶)시키라고 했다. 의아한 것은 부인 시즈코가 살아있다는 걸 전제로 해서 쓴 구절들이다. 재산 처리 문제는 시즈코와 상의하라든가, 시즈코가 살아 있는 동안은 가문을 유지해 달라든가, 노인이 될 시즈코가 살 집을 걱정한다든가 하는 대목들이다. 아마도 유서를 쓸 당시에는 부인이 함께 죽으리라고는 생각 못 했던 듯하다.
죽음에 열광하며 신격화 나서
1923년 건립된 도쿄의 노기 신사. 사진 출처 노기 신사 홈페이지
노기의 죽음에 열광하던 일본은 30년 후 일왕의 이름으로 젊은이들을 가미카제(神風)로 내몰았다. 생전에 러일전쟁 유족모임에서 그는 “여러분들의 자제분들을 죽인 노기입니다”라고 한스러운 어조로 자기를 소개했다지만, 그의 순사는 더 많은 청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정신적 토양이 되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는 소설 속에서 “(노기의) 지성(至誠)을 우리는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우리보다 후세대들에게는 당연히 통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라고 했지만, 그의 ‘지성’은 괴물이 되어 대일본제국과 함께 폭주했다.
日작가 할복, 일갈한 김지하
1970년 11월 25일, 노기의 정신과 결별했다는 전후 일본에서 또 한 번 충격적인 할복이 벌어졌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던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45)가 육상자위대 건물에서 할복 자결한 것이다. 그는 자위대 총감을 감금하고 총감실 발코니에서 자위대의 궐기와 일왕 친정(親政), 평화헌법 폐지를 부르짖었다. 그러고는 할복했다. 추종자 한 명도 옆에서 ‘순사’했다.
이 소식을 들은 한국의 젊은 시인 김지하는 일갈했다. ‘별것 아니여/조선 놈 피 먹고 피는 국화꽃이여/빼앗아 간 쇠그릇 녹여 벼린 일본도란 말이여/뭐가 대단해 너 몰랐더냐/비장처절하고 아암 처절하고 말고 처절비장하고/처절한 신풍(神風)도 별것 아니여/조선 놈 아주까리 미친 듯이 퍼먹고 미쳐버린/바람이지, 미쳐버린/네 죽음은 식민지에/주리고 병들고 묶인 채 외치며 불타는 식민지의/죽음들 위에 내리는 비여/역사의 죽음 부르는/옛 군가여 별것 아니여/벌거벗은 여군이 벌거벗은 갈보들 틈에 우뚝 서/제멋대로 불러대는 미친 군가여’(‘아주까리 신풍’). 시가 나오야는 김지하 시를 애송했을 것이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