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 ‘먹방 행보’·출근길 문답·브리핑… 靑 개방 맞물려 달라진 집권자 모습 제왕적 대통령像 정상화해야… 內治분점·인사권下放·檢독립 필수
박제균 논설주간
동아일보사가 청와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그런지, 가끔 가던 식당 중에 대통령이 다녀갔다는 곳들이 있다. 그런 식당들은 현직 대통령이 왔다는 데 남다른 자부심을 느끼지만, 그렇다고 꼭 잘되는 건 아니다. 정권의 부침(浮沈)이라는 거대한 파도의 끝자락은 때로 음식점 장사까지 때린다. 내가 애용하던 한두 집은 결국 문을 닫았다.
과거 대통령들은 외국에 나가지 않는 한 거의 청와대에서 밥을 먹었다. 장삼이사(張三李四)야 청와대 식사 한번 초대받길 고대하건만, 만날 먹어야 하는 대통령은 지겨울 법도 하다. 그래서 모처럼 ‘사제 식당’에 행차할라치면 경호 문제로 거의 007 작전이었다.
꼭 이래야 하나. 세계 최강 미국의 대통령들도 공개적으로 워싱턴DC의 식당에서 식사하고, 아이스크림을 들고 먹는다. 베이글을 테이크아웃하고, 단골 딤섬 식당을 찾는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즐겨 먹던 햄버거는 ‘오바마 버거’로 불린다. 경호를 이유로 대통령을 청와대에 가두는 것이야말로 제왕적 대통령의 출발점이다.
음식남녀(飮食男女)라고 했다. 원래는 군자가 식(食)과 색(色)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였으나, 지금은 음식과 사랑이 삶의 기본이라는 긍정적인 뜻으로 많이 쓰인다. 대통령도 사람이다. 청와대, 아니 용산 집무실의 문턱을 넘어 저잣거리에서 사람들과 만나 먹고 마시고 떠드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
윤 대통령의 먹방 행보가 임기 초 보여주기 쇼로 끝나지 않길 바란다. 그가 먹는 데 ‘진심인 편’인 듯하니. 기대를 걸어본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퇴근길 시장에서 시민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약속했다. 그 말을 의식한 듯 ‘퇴근길 국민과의 대화’라는 이름을 붙여 호프집 만남을 했으나 한 차례 보여주기에 그쳤다. 청와대에서 퇴근하지 않는 분의 퇴근길 대화라니…. 어색한 만남이었다.
그렇다. 윤 대통령의 먹방 행보는 청와대에서 나온 것과 관계 깊다. 청와대가 시내에 있지만 현실 세상과 격리된 듯한 데다 청와대의 ‘대(臺)’가 ‘흙이나 돌 따위로 높이 쌓아 올려 사방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든 곳’이란 뜻이다. 권력자가 높다란 대에서 내려오니 세상과 어울리는 게 수월해지는 것이다.
청와대 개방은 뜻밖의 효과도 거두고 있다. 심지어 “무섭다”고 한 관저의 80평 침실을 비롯해 대통령 삶의 속살을 보여준다. 그런 ‘시설’에 살아야 했던 대통령들도 쉽진 않았겠으나, 국민에게도 은연중에 대통령의 제왕적 삶에 대한 거부감을 키워준다. 이제 윤석열 이후 누가 대통령이 돼도 청와대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해졌다.
윤 대통령이 특출 나서 이런 변화가 만들어졌을까. 물론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대통령제가, 대통령상이, 대통령관(觀)이 달라진 세상에 따라가지 못하고 시대착오적이었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은 그런 세상의 변화에 올라탔을 뿐이다. 그것이 정상화요, 정치보다 강한 일상(日常)의 힘이다.
그가 정치 초년생이라는 점도 선입견 없이 변화를 수용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을 수 있다. 과거 대통령과 다른 윤석열 스타일은 제왕적 대통령제를 탈피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변화이기는 하다. 형식의 변화가 내용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더 중요한 건 내용의 변화다. 즉, 실제로 제왕적 권력을 내려놓느냐가 관건이다.
대통령의 권력 중 외교·안보는 나눌 수도 없고, 나눠서도 안 된다. 그러나 내치(內治)는 다르다. 대통령이 마음먹기 따라 충분히 분점과 권한 이양이 가능하다. 그러려면 인사권의 과감한 하방(下放)과 검찰권 독립이 필수다. 역대 대통령 누구도 못 한 일, 윤석열은 해낼 수 있을까.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