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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상행정에 본사는 ‘나몰라라’…일회용컵 계속 쌓인다

입력 | 2022-05-31 13:56:00

동아일보 DB


《2018년 기준 국내 프랜차이즈 카페와 제과점 등에서 사용된 일회용 컵은 최대 28억 개로 추산된다. 이 중 매장에서 회수된 건 전체의 약 5% 뿐이다. 반환되지 않은 컵은 대부분 소각 매립된다. 환경부가 이달 10일부터 ‘일회용 컵 보증금제(이하 보증금제)’를 시행하려고 했던 배경이다.

일회용 컵 보증금제는 종이컵이나 플라스틱컵으로 음료를 구입할 때 자원순환보증금 300원을 내고, 빈 컵을 반납할 때 다시 돌려받는 제도다. 매장이 100개 이상인 커피전문점, 제과·제빵업종, 패스트푸드점 등이 적용 대상이다. 전국적 3만8000여 개 매장이 해당된다.

보증금제는 시행 약 20일을 앞둔 지난달 21일 6개월 시행유예 결정이 내려졌다. 비용과 일손 부담이 크다는 업주들의 반발 때문이다. 업주들은 제도 폐지까지 요구하고 있어 12월 시행도 불투명하다. 보증금제를 둘러싼 갈등과 앞으로의 전망을 짚어봤다.》



●2년 간 준비했지만, 20일 앞두고 ‘유예’

일회용 컵에 보증금을 부과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3년 환경부와 일부 커피 프랜차이즈의 업무협약 형태로 보증금제가 도입됐다. 컵당 50~100원의 보증금을 받았다. 일회용 컵 회수율은 2003년 19%에서 2007년 37%까지 올랐다. 하지만 일회용 컵 보증금제는 일부 업체의 미반환 보증금 유용 논란 등을 겪으며 2008년 3월 폐지됐다.

보증금제 부활 논의가 시작된 건 2020년이다. 그 해 5월 보증금제 도입 내용을 담은 ‘자원의 절약과 재활용 촉진에 관한 법률(자원재활용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듬해 보증금을 관리하는 ‘자원순환보증금관리센터’가 출범했고, 올 1월엔 국민 설문조사 등을 거쳐 개당 보증금 300원을 확정했다.

2년 간 준비한 제도가 시행 2주를 앞두고 좌초한 이유는 뭘까. 가장 큰 책임은 환경부에 있다는 게 중론이다.

무인회수기 설치 준비 미비가 대표적이다. 업주들이 보증금제 도입을 반대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반환된 컵을 처리하느라 일거리가 늘기 때문이다. 영세 사업장에선 주문과 제조만으로도 일손이 부족한데, 이를 씻어서 보관하는 가욋일을 반길 리 없다. 재활용업체는 컵이 1000개쯤 모여야 수거에 나서기 때문에 며칠 간 수백 개의 컵을 보관하는 것도 부담이다.

업주들의 반발을 줄이려면 일손을 덜 수 있는 무인회수기 설치 확대가 필수다. 그러나 무인회수기 도입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지난해 말 환경부는 2022년까지 무인회수기 20대를 설치해 시범 운영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사업자 선정이 지체되면서 연말까지 개발과 테스트를 끝낼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다. 홍수열 자원순환사회경제연구소장은 “서울에만 최소 1000대 이상의 무인회수기를 설치해야 매장의 컵 처리 부담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며 “보증금제 시행 시기에 맞춰 무인회수기 개발을 더 서둘렀어야 했다”고 말했다.

● 정부는 ‘탁상 행정’, 본사는 ‘나 몰라라’
보증금제를 매장 100개 이상 프랜차이즈 가맹점으로 정한 것도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나온다. 프랜차이즈 가맹점이지만 1인이 운영하는 영세 매장도 적지 않다. 반면 매장수가 100개 미만이지만 대규모 매장을 운영하는 프랜차이즈나, 매출 규모가 큰 개인 카페는 적용 대상에서 제외됐다.

보증금제를 가장 크게 반대하는 것도 ‘매장 100개 이상 프랜차이즈 가맹점’에 해당하는 영세 카페를 운영하는 자영업자들이다. 비용 부담이 크다. 컵에는 반환할 때 바코드를 찍어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는 라벨을 붙인다. 이 라벨 구입비(개당 6.99원)를 점주가 내야 한다. 회수한 컵을 회수업체에 보내는 처리 비용도 점주 부담이다. 회수하기 쉽게 규격과 색상을 제한하는 표준컵은 개당 4원, 나머지 비표준컵은 10원이 든다.

보증금 300원에도 카드 수수료를 떼는데, 컵을 반환하더라도 이를 돌려받지 못한다. 신용카드 수수료율 0.5%를 기준으로 점주들이 컵당 1.5원을 부담하는 셈이다. 음료 한 잔을 팔 때마다 13~19원씩 손해를 보는 구조다. 환경부는 뒤늦게 미반환 보증금 등을 활용해 비용 부담을 거의 전액 보전하는 방안을 제시했지만 반발을 가라앉히기엔 역부족이었다.

프랜차이즈 본사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환경부와 각 프랜차이즈 본사는 지난해부터 꾸준히 보증금제 도입 방안을 논의해 왔다. 하지만 보증금제와 연동된 포스(판매정보관리시스템) 개발을 마친 곳은 지난달 중순 기준 전체 79개 업체 중 3곳에 불과했다.

정부와 프랜차이즈 본사, 점주 간의 소통도 부족했다. 고장수 전국카페사장협동조합 이사장은 “정부와 본사 간 어떤 얘기들이 오갔는지, 점주들은 시행 한 달 전 라벨을 구입할 때가 돼서야 진행 상황을 알게 됐다”며 “프랜차이즈 본사는 비용 등 추가 부담이 없으니 사실상 방관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6개월 뒤 시행도 보장 못해
보증금제 시행이 12월 1일로 유예됐지만 그 때 반드시 도입된다는 보장도 없다. 6개월 만에 점주들의 반발을 누그러뜨릴만한 지원책 마련이 쉽지 않아서다. 환경부 관계자는 “새 제도가 시행되려면 여론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동력을 얻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시행 시기도 좋지 않다. 올 11월 24일부턴 더 강력한 일회용품 사용 규제가 예정돼 있다. 카페 내 플라스틱 빨대, 편의점의 일회용 봉투, 매장의 우산 비닐의 사용이 제한된다. 홍 소장은 “보증금제 시행과 맞물려 일회용품 사용 규제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발 심리가 더 커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일회용 컵 사용을 줄여야 한다는 덴 국민 대다수가 동의한다. 2018년 기준 1인당 일회용 컵 사용량은 500개가 넘는다. 한국은 1인당 플라스틱 배출량이 세계에서 3번째로 많은 나라다.

정부가 현장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는 지적도 있다. 장용철 충남대 환경공학과 교수는 “서울의 한 지역 또는 지방 소도시에서 시범 운영을 하면서 적응 기간을 둘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다만 새 정부 들어 방역이나 경제 논리에 밀려 환경 정책이 잇따라 후퇴하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4월 시행 예정이었던 카페 일회용품 규제는 당시 안철수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재확산을 이유로 반대하면서 단속 및 과태료 부과가 유예됐다. 보증금제 역시 정치권에서 시행 유예 목소리가 나오자 환경부가 입장을 바꿨다. 결국 6·1지방선거를 앞두고 소상공인 표를 의식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김미화 자원순환연대이사장은 “일회용품 사용 규제에 정치논리가 개입돼서는 안 된다”며 “자영업자들의 피해는 다른 방법으로 지원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성민 기자 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