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아프리카 동부에 응고롱고로라는 곳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초원 중의 하나인 세렝게티 옆에 있는 이곳은 높다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인데, 분지치고는 상당히 크다. 서울시 크기의 절반쯤 되니 말이다. 더구나 건기마다 황무지로 변하는 세렝게티와는 달리 1년 내내 푸른 초원이라 많은 초식동물들이 잘 사는 덕분에, 이들을 호시탐탐 노리는 사자들도 잘 산다. 아니, 사실 사자들에게 이곳은 낙원이나 다름없다.
산 너머 세렝게티 초원에 사는 사자들은 초원의 제왕임에도 사는 게 만만치 않다. 건기가 되면 초식동물들이 풀을 찾아 떠나버리기 때문에 ‘생계’ 걱정을 해야 하고, 괜찮은 영역을 갖고 있으면 주변의 경쟁자들 때문에 마음 편할 날이 많지 않다. 반면, 응고롱고로 사자들은 600m 높이의 산들이 마치 성벽처럼 빙 둘러 있는 데다, 초식동물들도 떠나지 않으니 실력만 있다면 먹고사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천국 같은 곳이라고 불행이 찾아오지 않는 건 아니다. 1980년대 중반, 이곳에서 사자 연구를 하던 크레이그 패커 연구팀이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 10년 전과 비교해 보니, 사자 숫자는 많아졌는데 새끼들의 덩치가 작아지고 있었다. 정밀 조사를 해보니 수사자들의 정자가 부실해지면서 기형적인 정자가 늘어나고 있었다. 유전자에 문제가 생겼으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불행의 시작은 10여 년 전에 있었던 사건이었다.
하지만 번성은 홀로 오지 않았다.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수사자 한 마리가 유전자 풀(pool)의 전부였던지라 근친혼이 성행할 수밖에 없었다. 알다시피 근친혼은 유전자가 가진 약점을 계속 키우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좋지 않은 결과가 생긴다. 고대 이집트 왕조와 중세 유럽 왕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말이 좋아 순혈이지, 유전적으로 순혈은 막다른 골목으로 향하는 지름길이다.
더 큰 문제는 번성이 이 재앙을 키우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가끔이긴 하지만 세렝게티 초원을 돌아다니던 사자들이 산을 넘어 들어오면 이를 통해 새로운 유전자 유입이 이루어지곤 했는데, 번성 중인 사자들이 그때마다 이들을 ‘초전 격퇴’시켜 버리다 보니 고인 물 현상이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여러 노력 덕분에 최악의 상황까지 가진 않았지만, 이런 일은 어디서나 일어난다. 요즘 우리의 미래를 이끌어 갈 자리들이 대거 채워지고 있는데, 새로운 미래를 만들 ‘새로운 피’를 보기 힘든 것 같아 아쉽다. 불행은 언제나 번성과 함께 온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