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소녀, 한국서 맞는 ‘우크라 전쟁 100일’의 기록
우크라이나 고려인 3세로 한국으로 피란 온 예프레모바 소피야 양(앞줄 왼쪽)이 지난달 26일 경기 안산시 선일중 교실에서 같은 반 친구들과 손을 잡고 있다. 러시아 고려인 바투다예바 나란투야 양(앞줄 오른쪽)이 소피야 양의 ‘절친’이다. 안산=김동주 기자 zoo@donga.com
“이제부터 엄마와 소피야, 둘이서 가야 해. 알겠지?”
“아빠…. 안녕.”
우크라이나인인 예프레모바 소피야 양(15)은 올 3월 1일 몰도바 국경에서 아버지와 생이별했다. 소피야 양은 러시아 침공을 피해 어머니, 아버지와 차를 타고 고향인 남부 항구도시 미콜라이우에서 국경까지 약 300km를 달려왔다.
○ 2월 24일: 폭발음으로 시작된 전쟁
오전 5시 20분쯤이었다. 엄마가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 잠에서 깼다. 엄마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뭔가 ‘펑펑’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친구들이 모인 메신저 대화방은 순식간에 전쟁 뉴스로 채워졌다. 한 친구가 “주말에 햄버거 먹기로 한 우리 약속은 어떻게 되는 거야?” 하고 물었지만 아무도 답하지 못했다. 엄마에게 “이렇게 죽어야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많은데….
○ 2월 28일: “얼른 짐 싸!”
도로는 피란 차량으로 가득했고, 경찰은 수시로 검문을 했다. 오후 7시가 넘으니 통행이 금지됐다. 사흘 전 폭격을 피하러 내려간 아파트 지하 벙커에서 친구 블라다를 만났다. 작별인사를 못 하고 떠난 게 마음에 걸린다. 밤마다 안고 자던 곰돌이 인형을 집에 두고 왔는데…. 생각하니 눈물이 찔끔 났다.
○ 3월 24일: 낯선 한국에
6개국을 거치며 1만5300km를 여행한 끝에 한국에 도착했다. 살이 빠져 바지가 헐렁해졌다.몰도바에서 엄마는 외할머니와 외삼촌이 사는 한국으로 갈 거라고 했다. 운 좋게 만난 엄마 직장 동료 차를 얻어 타고 계속 서쪽으로 달렸다. 차를 많이 타 심하게 멀미가 났다. 루마니아, 헝가리, 오스트리아를 지나 대모(代母)가 사는 포르투갈에서 18일 머문 뒤 다시 프랑스를 거쳤다. 엄마는 “이렇게 세계 여행의 꿈이 이뤄질 줄 몰랐다”고 농담하며 나를 안심시키려 했다.
인천국제공항에 마중 나온 외삼촌을 보니 ‘이제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삼촌이 사는 안산시는 평화롭다. 그래서인지 오늘따라 고향 생각이 더 난다.
○ 5월 6일: ‘절친’은 러시아인
첫 등교 전날 밤은 ‘잘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에 잠을 설쳤는데, 어느덧 학교에 다닌 지도 한 달이 지났다. 오늘은 나란투야와 슬리퍼를 한 짝씩 바꿔 신었다. 요즘 학교에서 유행하는 우정의 표시다. 첫 한국어 수업에서 나란투야를 만났을 때부터 말이 잘 통했다. 나란투야는 우리나라를 침공한 러시아인 친구지만 상관없다. 전쟁은 높은 사람들이 일으킨 거지, 나란투야가 일으킨 게 아니니까. 친구가 생기니 마음이 든든하다.○ 6월 1일: 보고 싶은 아빠
우크라이나의 친구가 폐허가 된 미콜라이우 사진을 보내왔다. 끔찍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미콜라이우 유치원이 있는 주거지에 러시아군 포탄이 떨어져 최소 1명이 죽고, 6명이 다쳤다”고 했다. 친구 블라다의 아빠는 군인인데, 며칠 전 건물이 무너져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무엇보다 아빠가 걱정이다. 아빠랑 매일 밤 영상 통화를 한다. 새벽에 아빠가 문자를 보냈다. “토끼(아빠가 나를 부르는 애칭)야, 사랑한다.” 보자마자 답장을 보냈다. “나도 사랑해요. 내 가장 친한 친구, 아빠.”안산=전혜진 기자 sunris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