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행자에 진심인 사회로]〈6〉허울뿐인 노인보호구역
지난달 31일 보행자들이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 청과물시장 인근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이곳은 노인보호구역으로 지정됐지만 보행신호가 짧아 초록불이 끝나기 전에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하는 노인들이 다수 목격됐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지난달 31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경동시장 사거리. 점심시간 인파로 보도가 인산인해를 이루자 한 노인이 보도에서 내려와 차선 가장자리로 걷기 시작했다. 20m가량 떨어진 곳에서 우회전을 하던 버스 기사는 뒤늦게 노인을 발견하고 버스를 급정거했다. 버스와 충돌했다면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뻔한 순간이었다.
이날 이 일대에선 아찔한 장면이 여러 번 목격됐다. 보도에 상점들이 설치된 탓에 노인이 대부분인 보행자들은 보도 밖으로 나와 차도로 걸어야 했다. 미처 속도를 줄이지 못한 오토바이는 아슬아슬하게 보행자를 피해 다녔고, 보행자를 뒤늦게 발견하고 급정거를 하는 차량도 빈번하게 목격됐다.
○ 노인보호구역 지정 엇박자
노인보호구역(실버존)은 2008년부터 국내에 도입된 교통약자 보호 제도다. 인구 고령화로 노인 보행자 사고가 증가함에 따라 고령자들의 안전한 통행을 보장하기 위해 도입됐다. 노인보호구역으로 지정되면 차량 제한속도가 시속 30∼50km(지방자치단체별로 다름)로 설정되고, 주정차가 금지돼 노인 보행자의 안전성을 높일 수 있다.구역 설정은 지자체 권한인데 노인복지시설 인근 위주로 지정하는 탓에 전통시장, 병원 등 실제 노인 보행자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곳이 노인보호구역으로 설정되지 않는 등 ‘엇박자’가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경동시장 일대 역시 고령 보행자가 대부분이지만 노인보호구역으로 지정되지 않은 상태다.
노인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곳도 관리가 잘 안 되고 있었다. 경동시장에서 400m가량 떨어진 청량리청과물시장은 지난해 6월 노인보호구역으로 지정됐다. 하지만 노인보호구역 표지판 7개 중 4개가 가로수, 옥외광고판, 노점상 컨테이너 등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노면에는 표시가 있었지만 배색이 따로 없어 차량이 많은 시간대에는 노인보호구역임을 알기 어려웠다. 과속방지턱 같은 안전장치도 거의 없었다.
이 때문에 청과물시장 일대에선 빠르게 주행하거나 정차하려는 차량이 횡단보도를 건너는 고령 보행자와 뒤엉키는 등 위험한 상황이 수차례 목격됐다. 청과물시장의 한 상인은 “이곳이 노인보호구역이라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다”고 말했다.
○ “스마트 횡단보도 등 안전시설 늘려야”
전문가들은 노인 보행 사고 다발 지역을 보호구역으로 지정하고 철저히 관리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유 연구원은 “시장처럼 보도와 차도가 혼용되거나 보행자 동선이 단절되는 구간이 많은 장소에선 고령 보행자와 차량이 뒤섞일 위험이 크다”며 “이런 곳에 우선적으로 보호구역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최근 10년간 고령 보행 사망자(8606명)의 76%가 도로를 횡단하거나 차도로 통행하던 중 사고를 당했다.
국무조정실은 노인보호구역 지정 범위를 확대하고 스마트 횡단보도와 중앙 보행섬(긴 횡단보도 중간에 설치된 안전지대) 등 고령 보행자 특화 안전시설을 확충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유정화 행안부 안전개선과 사무관은 “무단횡단을 방지하기 위해 안전 펜스와 방지봉 등을 확충하고 관련 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임재경 한국교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고령 보행자는 활동 반경이 넓고 보행 목적과 경로가 다양해 보호구역만으론 실질적인 안전을 확보하기 어렵다”며 “보행섬 등 안전시설을 더 많이 설치하고 주거 지역의 교통 환경 전체를 점진적으로 개선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특별취재팀 ▽ 팀장 강승현 사회부 기자 byhu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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