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 섰던 한국의 반도체 시계 바이든 관심 후에야 비로소 ‘광속’ 작동
김용석 산업1부장
윤석열 정부 첫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수장은 ‘반도체 전문가’ 이종호 장관이 맡았다. 이 장관은 서울대 교수 시절인 2015년 나온 책 ‘축적의 시간’에서 “한국 반도체는 7∼8년 뒤가 문제”라고 일갈했다.
이 장관은 책에서 중국의 빠른 추격, 아직 부족한 한국의 기술 축적, 그럼에도 변치 않는 대학 등을 지적하면서 “한국 반도체 산업의 위기는 핵심 인력의 위기다. 이미 인력 양성이 시기적으로 늦었다”고 경고했다.
그때 말한 7∼8년 뒤가 바로 2022년 지금이다. 근본적인 상황이 전혀 바뀌지 않아 2015년의 호소를 그대로 끌어와 써도 이질감이 없다. 산업 전환기를 맞아 반도체 인력난 경고음이 터져 나온다. 교육계의 견고한 집단 이기주의와 국민의 미래 먹을거리를 방치한 무능한 정부, 반(反)기업 정서를 눈치 보며 기업 지원을 꺼린 정치가 합작해 ‘대한민국 반도체 시계’를 한동안 멈춰 세운 것이다.
지난해 반도체, 배터리 등 첨단산업 공급망이 이슈로 떠오른 뒤 바이든 대통령은 한국 정부를 거치지 않고 삼성전자 등 첨단기술 기업을 직접 상대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내기도 했다. 한국 반도체의 전략적 가치를 중요하게 보겠다는 메시지다.
사실 5월 20일 저녁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 공장을 방문한 바이든 대통령의 시계는 미국 동부 아침뉴스 시간대에 맞춰져 있었다. 바이든이 설 무대엔 미국 측 요청으로 미국 국적의 삼성 직원들이 자리했다. 행사장 화면엔 미국 기업 근로자가 비춰졌다.
바이든 대통령은 한국과의 기술동맹으로 중국을 견제하고, 삼성의 투자가 미국 내 일자리를 만들도록 의회의 법 통과를 설득하고, 합작법인에 노동력을 제공할 노조를 치켜세우며 민주당에 힘을 실었다. 반도체의 전략적 가치를 레버리지 삼아 일석삼조의 무대를 펼친 셈이다.
국제 정세가 시야에 들어온 다음에야 한국의 반도체 시계가 빠르게 돌아가는 느낌이다. 7일 국무회의에서 윤 대통령이 반도체 육성책을 강도 높게 주문하자 한덕수 총리는 9일 하루 일정을 반도체로 꽉 채우는 ‘광속행보’를 보였다. 여당도 이날 서둘러 반도체산업지원특위를 설치했다.
한편으론 반도체와 인재풀이 겹치는 디스플레이 등 다른 산업 분야가 좌불안석이다. 비상이 걸린 반도체와 달리 인재를 구할 활로가 보이지 않는 데다 반도체의 인재 입도선매까지 겹치면 더 큰 피해가 생길까 걱정이다.
문제의 핵심은 반도체 인재 부족이 아니라 기업과 산업 현장의 목소리가 교육 등 다른 시스템에 닿지 않는다는 데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유럽경영대학원 분석을 인용해 밝힌 데 따르면 교육과 직업이 따로 노는 불균형 문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국 중 한국이 가장 심각했다. 반도체 시계가 이제야 도는 가운데 시야 밖에서 또 어떤 기업 현장의 시계가 멈춰 서 있을지 생각하면 식은땀이 흐른다.
김용석 산업1부장 y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