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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작용 막는 약까지 한 움큼… 중복-과다복용 피할 ‘정책처방’ 절실[서영아의 100세 카페]

입력 | 2022-06-11 03:00:00

약에 멍드는 노인들




그래픽=강동영 기자 kdy184@donga.com

“고향에 혼자 계신 팔순 노모가 매일 한 움큼씩 약을 드신다. 의사들이 준 거니 다 드셔야 한다는데 걱정이 된다. 이걸 어디 물어봐야 할지도 막막하다.”

노인의학에 대한 기사에 달린 이런 댓글을 보며 노인 약에 대한 안전관리 시스템이 궁금해졌다. 한 움큼 노인의 약, 어떻게 다뤄야 할까.


○ 약 부작용 치료 위해 또 다른 약 처방 ‘처방연쇄’
실상을 알기 위해 우선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에 내원한 케이스를 가져왔다. 낙상으로 누워 지내게 된 85세 여성 A 씨의 병력을 보면 부작용을 치료하기 위해 새로운 약이 처방되는 ‘처방연쇄’의 폐해를 볼 수 있다.

시작은 고혈압 약이었다. 그가 먹던 약은 칼슘채널차단제(CCB) 계열인데, 노인에게서는 심하게 붓고 변비와 무기력증을 가져오는 부작용이 잦다. 다리가 퉁퉁 부어 병원을 찾은 그에게 의사는 강력한 이뇨제를 처방했다. A 씨는 그 뒤 너무 자주 화장실에 가다 보니 요실금이라 생각해 비뇨기과에서 요실금 치료제를 처방받았다. 이 약은 변비와 인지기능 저하를 유발했다. A 씨는 이번에는 신경과에 가서 치매 진단을 받고 치매 약과 뇌 영양제를 받았다. 치매 약은 요실금을 악화시킨다. 밤에 소변 때문에 4번씩 깨다 보니 다시 비뇨기과를 찾은 A 씨에게 의사는 더욱 강한 항콜린성 약을 처방했다. 항콜린성 약은 졸음과 무기력증을 가져와 낙상 위험을 높인다. A 씨에게 결국 낙상이 찾아왔다.

이처럼 증상만을 좇아 내과와 비뇨기과, 신경정신과를 돌다 보면 처방의 원인과 결과가 꼬리를 무는 무한반복이 일어나게 된다. 환자의 심신은 만신창이가 된다. 이 같은 연쇄의 악순환을 끊는 데는 ‘약을 걷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탈(脫)처방이라고 한다.

쇠약증으로 병원에 입원한 78세 여성 B씨 사례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시행 중인 ‘다제약물 관리사업’에 포함돼 있었다. B 씨는 그간 정형외과와 신경과, 내과에서 혈압약과 어지러움약, 위장약 등을 처방받아 먹어 왔다. 서행성 보행과 손떨림 등 파킨슨병과 유사한 증세를 보였는데, 신경과 검사에서 B 씨가 보이는 파킨슨병 증세가 약물유발성일 가능성이 제기됐다. 정형외과에서 처방한 위장운동조절제에 유사 파킨슨병 유발 성분이 들어 있었던 것. 이 약을 끊자 환자는 점차 회복 양상을 보였다. 전신무기력 증세도 신경안정제와 근육이완제, 수면제 등 중추신경계 억제약이 처방돼 있는 것과 관련이 깊다고 판단해 근육이완제는 중단하고 신경안정제와 수면제는 감량했다.

고령화와 만성질환 증가로 다약제(polypharmacy) 복용 인구는 갈수록 늘고 있다. 한국의 65세 이상 고령자 중 5개 이상 약물을 복용하는 사람이 약 260만 명, 10개 이상 약물을 복용하는 고령자는 81만500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한국에서 노인의 다약제를 부추기는 원인에는 진료과 중심의 의료제도가 있다. 환자는 증상에 따라 각기 다른 병원을 찾아가야 한다. ‘3분 진료’에 쫓기는 의사들은 각기 자기 과에 초점을 맞춰 약물처방을 하면 그뿐, 환자가 다른 과에서 어떤 약을 처방받아 복용하고 있는지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결국 각 진료과에서 그때그때 처방해 주는 약들이 쌓이게 된다.


○ 선진국선 주치의가 걸러주고 약국에서 약 정리

그래픽=강동영 기자 kdy184@donga.com

고령화가 서서히 진행된 선진국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을까.

영국에서는 1940년대부터 주치의 제도를 기반으로 한 의료시스템을 구축했다. 2005년부터는 지역 약사가 환자의 약물 복용 상황을 점검해 주는 시스템이 가동됐다. 두 가지 이상 약물을 복용하거나 고위험 약물(비스테로이드 항염증제, 항응고제, 항혈전제, 이뇨제) 중 하나를 복용하는 고령자는 1년에 한 번씩, 10개 이상 약물을 복용하는 고위험군은 연 2회 약물검토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약사는 28파운드(약 4만3800원) 정도의 수가를 받는다. 캐나다 호주 등 과거 영연방이던 국가들에서 비슷한 제도를 운영 중이다.

‘노인 부적절 약물’ 지정도 늘고 있다. 미국에서는 1991년 비어스(Beer‘s) 지침이 개발돼 업데이트를 거치며 사용된다. 노인에게 사용하면 효과가 없거나 부작용 위험이 높은 약물에 대해 사용하지 말 것을 권하는 목록이다.

2008년 아일랜드는 비어스 지침의 한계점을 보완한 노인주의약품 사전점검지침(STOPP)을 개발해 발표했다. 2003년 개정된 비어스 기준에 33개 약물을 추가하고 계통별로 정리했다. 처방과 투여기간의 적절성, 약물-약물 상호작용, 약물-질병 상호작용, 약물 중복처방까지 범위를 확장했다. 캐나다와 프랑스 노르웨이 독일 등에서도 유사한 지침이 나왔다.

한국에서는 2015년 10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의약품안심서비스(DUR)를 통해 노인 주의 의약품 20개 성분(벤조다이아제핀 13개, 삼환계 항우울제 7개 대상)을 지정했고 지난해 7월 이를 102개 성분까지 확대했다.

○갈 길 먼 한국의 다약제 관리사업
최근 노인 다약제 관리를 위한 노력이 다방면에서 이뤄지고 있지만 갈 길은 멀다. 대형병원에서는 노년내과를 중심으로 탈처방이 시도되고 있다. 특히 서울아산병원은 2018년 ‘약물조화클리닉’을 만들어 환자 맞춤형 약물 최적화를 도모하고 있다. 클리닉 전담 약사가 노년내과 교수와 함께 외래진료실에 들어가 환자의 복약 현황과 병력을 듣고 의사와 함께 약물관리 방안을 짜는 방식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2018년부터 약사회와 함께 ‘다제약물 관리사업’을 시작했는데, 이 또한 시범사업 단계다. 첫해 9개 지역에서 약사가 가정방문을 통해 약물복용 지도를 시작해 지난해에는 106개 지역으로 확대됐고 35개 병원도 참여했다. 다만 시범사업인 만큼 관리 대상은 한정적이다. 46개 만성질환자, 상시 복용하는 약 성분이 10개 이상이거나 마약성 진통제, 항응고제 등 ‘집중관리약제’를 처방받은 환자가 포함된다.

사업 참여자들은 “의사와 약사 간 소통의 통로가 없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한다. 영국 약사들은 주치의에게 처방 변경을 요청할 수 있지만, 한국은 제도화된 통로가 없다 보니 처방 변경을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서울아산병원이 국내 최초로 만든 ‘약물조화클리닉’의 전담약사인 이미리내 씨는 노년내과 의사와 함께 외래에 들어간다. 그는 “고령자의 다약제 관리를 위해서는 의사와 약사의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서울아산병원 이미리내 약사는 “고령자의 다약제 관리는 의사와 약사가 각기 다른 관점에서 환자의 병력 청취와 현황 파악을 통해 연관관계를 평가한 뒤 종합적 검토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며 의사와 약사의 협력을 강조한다.

배민숙 건보공단 만성질환관리실 의료이용지원부장은 나아가 “만성질환을 가진 고령자일수록 이 병원 저 병원에서 증세만 가지고 관리해서는 안 된다”며 “환자를 온전히 포괄적 통합적으로 관리해 주는 주치의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1월 ‘노인의 다약제 사용 관리방안’ 보고서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노인에게 위험도가 높은 다약제 사용 조합에 대한 명시적 기준부터 도출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당장 고향 어머니의 한 움큼 약은 어디서 자문을 구해야 할까.

우선 노년내과가 설치된 병원들에 가서 의뢰하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매우 한정적이다. 서울시에서 운영 중인 ‘세이프약국’을 찾아가는 것도 방법이다. 5개 이상 약물을 복용하거나 2가지 이상 만성질환을 앓는 사람의 약물상담과 복약지도를 해준다. 현재 400여 개 약국이 등록돼 있는데 서울열린데이터광장에서 검색하면 가까운 약국을 찾을 수 있다.

다약제 사용자의 약물상담과 복약지도도 해주는 ‘세이프약국’.



환자 스스로도 똑똑해져야 한다. 자신이 복용하는 모든 약을 목록화하거나 처방전을 보관해 두고, 필요시 병원이나 약국에 알려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운영하는 DUR의 ‘내가 먹는 약! 한눈에’ 서비스에 들어가면 자신의 투약 이력을 볼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노인의 약 관리를 위한 국가 차원의 로드맵이 필요하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