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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제목을 붙여주세요”[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입력 | 2022-06-13 03:00:00

〈51〉당신의 제목은 무엇입니까



불가리아 태생의 설치미술가 크리스토의 1967년 작품인 ‘웨딩드레스’. 한 여성이 감당하기 힘든 크기의 짐을 끌고 있는 모습을 통해 다양한 상상력과 해석의 여지를 열어놓았다. 사진 출처 아트리뷴


한 여성이 짐을 끌고 있다. 이것은 불가리아 태생의 예술가, 크리스토(1935∼2020·본명 크리스토 블라디미로프 자바체프)의 작품이다. 일견 특이할 것 없어 보이는 이 작품이 흥미로운 것은 일단 ‘웨딩드레스’라는 제목 때문이다. 아름다운 여성이 감당하기 어려워 보이는 짐을 끌고 있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웨딩드레스라니. 결혼이란 결국 무거운 짐을 지는 일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일까.

자, 결혼행진곡이 울려 퍼지고, 저 멀리 신부가 치렁치렁한 웨딩드레스를 입고 주단 위를 걸어온다. 이때 단상 위의 주례는 정현종의 시 ‘방문객’을 낭송하는 거다. “사람이 온다는 건/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그는/그의 과거와 현재와/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실로, 인간의 과거 현재 미래는 짐으로 가득하다. 결혼을 한다는 것은 제도적으로 그 짐을 함께 떠안게 된다는 뜻이다. 주례가 신랑 신부에게 엄숙하게 묻는다. 짐을 함께 나누어질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좀 더 물질적인 해석을 해볼까. 원제가 웨딩드레스라는 점에 착안하여, 저 작품에 웨딩드레스 대신 ‘혼수’라고 제목을 붙이면 어떨까. 자, 결혼행진곡이 울려 퍼지고, 저 멀리 신부가 묵직한 혼수 더미를 끌고 주단 위를 걸어온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자기 경제 상태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그렇다. 혼수는 그야말로 정치경제적이다. 혼수는 상대, 그리고 상대 집안의 경제 상태를 감지할 수 있는 지표다. 로맨틱한 감정만 즐기려면 결혼이 최적의 선택은 아니다. 결혼은 경제 공동체를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혼수를 두고 이런저런 실랑이 끝에 파혼에 이르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정치경제적인 의미가 덕지덕지 붙은 ‘혼수’가 지긋지긋한 사람은 저 작품에 ‘혼수’ 대신에 ‘혼수상태”라는 제목을 붙이고 싶을지도 모른다. 어쩐지 저 여인은 혼수상태에 있는 거 같다.

오스트리아 빈의 현대미술관(MUMOK)에 2012년 전시된 ‘웨딩드레스’의 조각 작품(위 사진). 아래 사진은 크리스토가 디자인 노트에 그린 ‘웨딩드레스’ 작품의 초안. 김진희 씨 제공, 스미소니언 박물관 홈페이지

이처럼 예술은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한다. 많은 해석을 불러올수록 더 풍요로운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 과연, 크리스토의 저 작품에 아무 말이나 붙여도 제목으로 다 적절한 거 같다. 무거운 걸 끌고 있다는 점에 착안해서 ‘일하는 중’이란 제목을 붙일 수 있다. 멈추어 서 있다는 점에서, ‘휴식 중’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도 있다. 저 정도 무게라면 운동도 되겠지, ‘근육 강화 중’. 큰 짐을 끌고 있으니, 노역을 나타내는 제목을 붙일 수도 있다. ‘이사 중’ ‘학기 중’ ‘원고 집필 중’ ‘원고 재촉 중’ ‘육아’ ‘설거지’ ‘출근’ 등등.

노역이 아니라 노역을 하는 사람을 나타내는 제목을 붙일 수도 있다. ‘노예’ ‘노비’. 노역을 노예만 하겠는가. ‘짐꾼’ ‘학생’ ‘리더’ ‘여신’. 아니면, 아예 ‘출근’ 혹은 ‘월요일’이라고 해볼까. 좀 더 추상적인 제목을 붙여 보는 것은 어떨까. ‘희망’ ‘절망’ ‘존재하는 중’ ‘존재하지 않는 중’ ‘인생’ ‘인류’.

뭐야, 이거 다 되잖아! 정말 신기한 작품이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혹은 미쳐버린 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서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크리스토의 ‘웨딩드레스’ 이미지를 페이스북에 올리고, 한마디를 남겼다. “댓글로 제목 붙이시는 거 환영.” 그러자 곧 사람들이 댓글로 자기 나름의 제목을 달기 시작했다. 구체적인 자세에 주목한 제목으로는 ‘개폼’ ‘똥폼’. 무거운 짐을 끈다는 이미지에 착안한 댓글로는 ‘차력’ ‘홈트’. 힘든 대상을 지칭하는 제목으로는, ‘삶의 무게’ ‘기상 중’ ‘결혼하면 이렇게 되는 거야’ ‘아이들 데리고 커리어 쌓기’ ‘남편’ ‘읽지 않을 논문 출력만 한 대학원생’ ‘대출 노예의 부역’ ‘점심 메뉴 결정’.

신체 상태에 비유한 제목으로는, ‘똥 싸기 힘든 날’ ‘내 몸속 지방 덩어리’ ‘만성 변비’ ‘방귀’ 등이 있었다. 그 밖에 심오한 제목으로는 ‘육탈’ ‘my way’ ‘무의식’ ‘난 누구? 여긴 어디?’ ‘잘라버릴 용기’ ‘몰락한 민주주의’ ‘차별’ ‘엘리트주의’. 다소 의외의 제목으로는 ‘코로나’ ‘당근거래’ ‘자발적 인질극’ ‘원더우먼’.

정반대의 제목들도 제출되었다. ‘사라지지 못하는 중’이라는 제목이 있는가 하면 ‘사라지는 중’이라는 제목도 있었고, ‘버리지 못하는 자’라는 제목과 더불어 ‘분리수거 중’이나 ‘재활용품 버리는 날’이라는 제목도 나왔다. ‘진짜 다 되네요’라는 댓글도 있었고, ‘웨딩드레스…가 젤 안 어울는데요’라는 반응까지 나왔다.

이렇게 다양한 제목이 가능하다고 해서, 정말 무슨 제목이든 다 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 ‘내로남불’ ‘언 발에 오줌 누기’ ‘보신탕’ ‘고르곤졸라’ ‘뿅망치’와 같은 제목은 저 작품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해석은 무한히 열린 것은 아니다. 열려 있되, 완전히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작품 앞에서 각자 나름대로 상상하지만, 아주 멋대로 상상하는 건 아니다. 동시대의 문화와 작품의 양상이 해석을 제약한다. 그래도 오리무중인 작품의 경우에는 제목이 감상을 도울 수 있다. 그 도움이 지나치게 구체적일 경우, 제목이 작품의 의미를 축소하기도 한다.

작품은 일단 감상자의 상상을 자극할 만큼 매력적이어야 한다. 제목은 그 부풀어 오른 상상을 어딘가로 흘려보내는 배수관 역할을 한다. 배수관을 통과한 상상들이 모여 결국 커다란 바다를 이룬다. 한 사회가 얼마나 광대한 상상의 바다를 가지고 있는가. 그것이 그 사회의 풍요로움을 나타내는 중요한 지표다. 그 바다에 가보고 싶어서 오늘도 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전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