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돈을 송금하시나요?” 방금 전 자신의 계좌로 입금한 돈을 또 다른 자기 명의의 계좌로 이체해달라던 고객은 민지수(43) 차장의 질문에 우물쭈물했다. 고객은 휴대전화를 꺼내 메신저로 누군가에게 물어보는 듯 했으나 여전히 답을 하지 못했다. 본인 계좌에 돈을 송금하는 이유를 밝히지 못한 채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고 민 차장은 직감했다. ‘보이스피싱범이다.’
은행 근무 20년 경력의 민 차장이 보이스피싱 인출책의 덜미를 잡은 건 지난달 9일 오후였다. 자신이 근무하는 서울 구로구 한 농협은행 지점에 젊은 남성 고객 A씨가 창구에서 150여만원을 자신의 계좌에 입금한 뒤 10분이 채 지나지 않아 그 돈을 자신 명의의 타행 계좌로 다시 송금하려 했다.
A씨의 통장 거래 내역을 살펴보던 민 차장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고 한다. 한동안 거래 활동이 없었던 A씨는 민 차장이 있는 은행에 오기 직전 누군가로부터 1000만원을 송금받아 다른 은행에 들러 650만원가량을 현금과 수표로 인출한 상태였다. 나머지 350여만원은 오픈뱅킹으로 이체돼 있었다.
그때부터 민 차장은 ‘송금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1000만원을 입금한 사람과 무슨 관계인지’ 등 질문을 시작했다. A씨는 명확히 답을 하지 못했고 그 사이 동료 직원이 경찰 신고 버튼을 눌렀다. “빨리 돈을 보내달라”고 재촉하는 A씨 앞에서 민 차장은 대화를 이어 나가며 시간을 끌었다. 행여 도망갈까 싶어 신분증과 통장도 내주지 않는 기지를 발휘했다.
200m 거리에 있던 지구대 경찰관들은 신고가 접수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현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상대와 입씨름을 벌이던 민 차장에게는 그 잠시가 너무도 길게 느껴졌다고 한다. 그는 “경찰관에게 상황을 설명하는데 손이 덜덜 떨렸다”고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현장에서 A씨를 붙잡은 경찰은 보이스피싱에 연루된 정황을 포착해 조사를 진행 중이다. 30대 남성인 A씨는 대출을 해주겠다는 말을 듣고 불상의 인물에게 계좌를 내줬을 뿐 그것이 범행에 이용될 줄 몰랐다는 취지로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처음 피해자로부터 받은 1000만원은 보이스피싱 조직 측에서 자녀 납치를 빙자해 뜯어낸 것으로 조사됐다.
피해 구제 여부 및 정도는 아직 불투명하다. 다만 검거 당시 A씨가 현금과 수표로 소지하고 있던 650여만원은 현재 경찰이 압수 중이라 추후 피해 회복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서울 구로경찰서는 지난 10일 “적극적인 대처로 범인까지 검거할 수 있었다”며 민 차장에게 감사장을 전달했다.
[서울=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