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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질환 발생 위험요인, 코호트 연구가 답이다[정신건강 대전환기, 우리 사회의 길을 묻다]

입력 | 2022-06-15 11:27:00


김동현 한림대학교 보건과학대학원장

‘코호트’는 일정 시점에 지역, 직업 등과 같은 특성을 공유하는 집단을 의미한다. 코호트의 어원은 로마 시대에 로마군단이 10개의 코호르스(대대)로 구성되었다는 데서 시작됐다.

같은 해에 태어난 이들을 ‘출생 코호트’라고도 한다. 코호트 연구는 이러한 코호트 집단을 대상으로 개인정보, 식습관 등의 기저조사(baseline survey)를 하고 난 뒤, 이들을 장기 추적 조사해 질병과 건강상태 등의 발생과 인과적 관련성을 파악하는 역학 연구다.

코호트 연구로 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사례가 있다. 미국 공군을 대상으로 자살예방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마친 미 로체스터대 정신과 케리 녹스 박사는 정신과 영역, 특히 자살예방에서 코호트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녹스 박사는 2000년 초 지난 50여 년 동안 미국에서 심장병 발생과 사망이 크게 감소한 이유는 약물 등 치료기술의 발전 뿐 아니라 심장병 발생 위험을 높이는 여러 요인들을 찾아내서 1차 예방을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1940년대 미 하버드 대학병원의 심장질환 임상 의사들은 병원에 찾아온 환자 치료에만 그치지 않고, 보스턴 인근 플레밍험이라는 작은 마을의 건강한 지역주민을 장기 추적해 어떤 특성을 지닌 이들에게 심장병이 잘 발생하는지 연구했다. 이 장기 추적 코호트 연구를 통해 고혈압, 고지혈증, 흡연, 운동 부족 등이 심장병 발병 요인임을 밝혀냈다.

녹스 박사는 같은 이유로 자살을 예방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건강한 이들을 대상으로 추적 조사해 어떤 이들이 자살을 생각하고, 어떻게 자살을 시도하는 지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호주에서 주목할 만한 연구가 시작됐다. 호주국립대학에서 수행하는 PATH 코호트 연구(The Personality and Total Health Through Life) 프로젝트다. 정신질환의 1차 예방을 위한 과학적 근거를 찾기 위해 인구집단에 기반한 코호트 연구다. PATH 코호트 연구에서는 1999년 호주 캔버라 인근 건강한 지역주민 7500여 명을 대상으로 해마다 기저 및 추적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PATH 연구를 통해 그동안 300여 편의 의미있는 연구논문들이 나왔다. 대표적으로 불안과 우울이 공존하는 질환으로, 이 두 질환 사이에는 인과적 기전이 공유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또 우울이 자살생각에는 영향을 미쳤으나, 자살시도에 미치는 영향은 관찰되지 않았다. 오히려 만성질환, 실직, 무력감 등이 자살시도와 관련이 있다고 하였다. 호주는 이러한 장기 추적 코호트 연구 결과에 근거해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정신건강 강화 정책을 수립하고 있다.

한국은 정신질환실태 파악을 위한 단면조사를 5년 주기로 반복 진행하고 있다. 2016년 정신질환 실태조사에서는 우리나라 국민 중 정신질환으로 인한 평생유병률이 25.4%, 1년 유병률이 11.9%로 보고됐다. 그런데 이와 같은 실태조사를 통해 주요 정신질환의 유병률과 현황은 파악할 수 있으나, 질환 발생 위험요인을 찾아낼 수는 없다.

이러한 실태조사로는 한국인이 겪는 보편적인 정신심리 건강문제, 예를 들어 정신적 불안, 수면장애, 분노와 울분, 번아웃 증후군, 알코올의존 등이 왜 생겨나는지 알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이를 예방할 수 있는 정신보건정책을 제대로 수립하기 어렵다.

이제 우리나라도 한국인의 정신심리적 문제가 발생하는 지점을 지역사회 현장에서, 생애주기적 관점에서 재구성하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조기에 예방적 개입을 하기 위한 근거기반 정신보건정책 개발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 일반 인구집단을 대상으로 한 장기 추적 코호트 연구 인프라를 시급히 구축해야 할 것이다.


김동현 한림대학교 보건과학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