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열린 노동당 8기 5차 전원회의장에서 김정은의 말을 노동당 상무위원들인 조용원 당 조직비서와 김덕훈 총리가 무릎을 꿇은 채 듣고 있다. 조선중앙TV 화면 캡처
주성하 기자
“우리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며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게 하자는 것이 우리 당의 확고한 결심입니다.”
2012년 4월 김일성광장 열병식에서 김정은은 이렇게 말했다. 그의 첫 연설이자 인민을 향한 첫 약속이었다. 10년이 지나 돌아보니 북에선 김정은만 허리띠를 조이지 않고 살아온 것 같다. 연설 당시 90kg으로 추정되던 몸무게는 140kg으로까지 늘었다. 작년에 20∼30kg 정도 뺀 것으로 보였지만 최근 요요 현상이 온 듯 다시 살이 부쩍 쪘다.
북한 인민들은 김정은과 정반대로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삶을 살고 있다. 2017년 이후 강력한 유엔 대북제재로 북한 외화소득의 90% 이상이 줄었다. 코로나 발생 이후 자발적 셀프 봉쇄로 남았던 10%도 벌지 못하게 됐다. 북한은 농경 왕조 사회로 회귀했다. 시간이 갈수록 외화와 예비물자 창고는 고갈되고 인민의 영양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격리 조치로 주민들은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가고 있다. 약이 가득 진열된 북한 선전매체들의 평양 약국 사진과 달리 지방 사람들은 약이 없어 고열을 그대로 견뎌야 한다. 장마당에서 그나마 팔리던 해열제는 코로나가 퍼지자마자 씨가 말랐다. 나라 곳곳에서 죽어간다는 아우성밖에 없다.
올해 김정은은 삼재(三災)를 만났다. 코로나가 갑자기 휩쓸면서 민심이 흔들리고, 나라 곳간이 텅텅 비었다. 방역에 실패한 김에 무역을 재개하려니 이번엔 중국이 문을 닫았다. 중국이 단둥 주민들에게 “남풍이 불면 창문을 닫으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외신 보도가 현재 북-중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교역이 막히면 농사라도 잘돼야 하는데 올봄 심각한 가뭄과 고온이 북한을 덮쳤다. 비료 생산과 수입도 제대로 되지 않으니 작황이 좋을 수가 없다.
여기에 또 다른 무서운 재앙이 다가오고 있다. 바로 코로나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촉발한 스태그플레이션이다. 경기 불황과 물가 상승이 동시에 발생하는 것이다. 세계은행은 6월 발행한 ‘세계경제전망’ 보고서를 통해 올해 세계 경제성장률 전망을 2.9%로 대폭 하향 수정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80여 년 만에 최악의 경제 침체가 예상된다고 발표했다.
이렇게 국가가 부도날 정도가 되면 부패한 지도층을 향한 대중의 분노가 커지게 된다. 스리랑카에서도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대는 오랜 기간 족벌정치를 해온 마힌다 라자팍사 총리의 관저에 난입해 불을 질렀다. 결국 라자팍사 총리는 지난달 사임을 발표한 뒤 헬기를 타고 가족과 함께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해군기지로 도피했다.
역사는 반복된다. 2010년 북아프리카와 중동을 휩쓴 ‘아랍의 봄’ 혁명도 경제난과 물가 인상을 견디지 못한 민중들이 폭발한 것이다. 철옹성 같던 장기집권 독재 국가들이 줄줄이 무너졌다. 2003년부터 동유럽과 중앙아시아를 휩쓸어 독재 정권들을 줄줄이 무너뜨린 ‘색깔혁명’도 같은 이유로 촉발됐다. 스태그플레이션은 가난한 독재 국가들엔 독약이다.
북한은 가난한 독재국가 순위에선 선두를 달린다. 스스로 세계 왕따를 자처하며 자력갱생으로 살겠다고 하지만 원유와 부족한 식량까지 자체 해결할 순 없다. 중국과 러시아가 얼마나 도와줄지는 몰라도 세계적인 물가 상승은 북한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물론 북한은 정보 유통을 철저히 차단하고 연좌제라는 21세기 유일무이한 극악한 반(反)인륜적 공포 독재를 펴고 있기에 수십만, 수백만 명이 죽어도 시위가 벌어질지는 장담할 수가 없다. 그러나 치솟는 물가와 대량 아사자는 북한의 내구성에 심각한 균열을 만들어내고 수십 년의 상처를 만들 수 있다. 화려한 쇼에 집착하고 인민의 주머니를 털어 대규모 공사판을 벌여 놓고 있는 김정은이 올해의 삼재는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