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글로벌 식량 공급 쇼크는 2024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최근 발표한 식량위기 보고서에서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전쟁이 끝나더라도 식량을 공급하던 시스템이 복구되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이상 기후로 생산량 감소까지 겹치고 있어 식량 부족과 가격 상승이 오래갈 것이라는 우려가 큽니다. ‘식량 안보’라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한국 근대농업의 아버지로 불리는 우장춘 박사(1898∼1959·사진)를 떠올리게 됩니다.
우장춘 박사는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습니다. 명성황후 시해 후 일본으로 망명한 아버지 우범선이 1903년 암살당하자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습니다. 어릴 때 일본인 혼혈이라는 이유로 또래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는데 어머니인 사카이 나카가 “발에 밟히면서도 꽃을 피우는 길가의 민들레처럼 어려움을 이기고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말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그가 일본인으로 귀화해 일본학자로 살았다면 일생이 편안하고 안락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시 쓴 논문의 영어이름 표기를 ‘우 나가하루(Nagaharu U)’로 쓸 만큼 그는 자신이 조선인임을 분명히 했던 사람입니다. 광복 직후 한국은 오랜 식민지 농업정책의 여파로 농업 생산력이 부족해 우량 종자의 개발과 보급이 국민의 생존과 직결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고국으로 돌아와 1950년 한국농업과학연구소의 초대 소장으로 취임한 이후 우 박사는 이전까지 전량 수입하던 배추와 무의 종자를 한국 환경에 맞게 개량해 보급했습니다. 제주도에는 감귤과 유채 재배를 권장해 오늘날 감귤의 대표 재배지가 되도록 했으며, 바이러스 감염에 취약한 강원도의 감자 종자도 개량했습니다. 평생 조국을 위해 헌신했던 그는 1959년 세상을 떠나기 3일 전 병원에서 거행된 대한민국 문화포장 수여식에서 조국이 자기를 인정했다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우 박사는 대한민국에 현대 농업을 보급해 국민들이 기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쌀 이외 대부분의 농산물을 수입에 의존하는 형편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다른 나라에서 농산물을 외교적 무기로 삼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농업에 대한 국가 차원의 관심이 요구되는 시점입니다.
이의진 누원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