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판결후 쟁점 부상한 ‘임피’
이상희 한국공학대 지식융합학부 교수
《최근 대법원이 노사가 고령 근로자 임금을 하향 조정하기로 합의한 임금피크제를 무효로 보는 판결을 내놨다. 노사가 합의했음에도 해당 임금피크제 내용이 고령자고용법 제4조가 정한 ‘연령차별 금지’의 강행규정을 위반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법원이 임금피크제의 유효성 기준을 제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산업 현장에선 동요가 일어날 수 있다. 임금피크제 적용을 받는 근로자나 기업으로서는 회사의 임금피크제가 유효한 것인지 궁금할 것이다. 상급 노동단체들은 이번 판결을 계기로 ‘임금피크제 무효론’을 발전시키고 싶어할 수도 있을 것이다.》
○ 2003년 등장한 임금피크제, 고령화로 가속
당초 우리나라 최초의 임금피크제는 중·고령층 조기퇴직 때문에 도입됐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당시 유행하던 ‘사오정’(45세 정년)이나 ‘오륙도’(56세까지 직장 다니면 도둑) 표현처럼 중·고령층 근로자들의 조기퇴직 문제가 불거졌다.
그 후 한국은 급속한 고령화 추세를 맞았다. 고령 근로자의 고용 안정이 국가적 이슈가 됐다. 고령 근로자의 고용 안정은 고용 연장 또는 정년 연장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 고령 근로자의 고용 연장은 높을 대로 높아진 연공 또는 호봉임금이 계속 유지되는 문제를 초래한다. 연공 또는 호봉임금은 고령자의 고용을 안정시킬 수 있는 60세 정년 의무화에 큰 걸림돌이 됐다.
이 때문에 현행법은 정년을 연장하되 ‘정점’에 있는 호봉임금을 조정할 수 있도록 했다. 2013년에 만들어져 2016년부터 시행된 고령자고용법 제19조는 60세 이상으로 정년을 의무화했다. 같은 법 제19조의2 제1항에서는 정년을 연장하는 기업의 노사는 임금체계 개편 등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당시 산업계는 정년 연장은 임금피크제를 전제로 해야 한다고 했다. 노동계는 임금피크제와 정년 연장을 연계시키지 말라고 했다. 고민 끝에 임금체계 개편 등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고 법에 규정했지만 이를 강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정년 연장 시 임금피크제와 같은 임금 조정을 할 수 있다는 의미에 그쳤다.
○ 한국 일본만 도입한 임금피크제
실제 임금피크제는 우리나라와 일본 정도에서만 발견되는 임금 조정 방식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임금피크제는 일본의 고령자 고용 문제 대응 방식을 벤치마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본의 임금체계 역시 우리와 같은 연공임금 체계가 지배적이다. 이것이 일본사회의 고령화 추세와 맞물리면서 임금 상승의 정점 시기부터 임금 조정을 하는 방식이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임금피크제는 고령사회 때문에 등장했지만 결국 뿌리 깊은 호봉임금 체계 때문에 확대된 것이다. 호봉임금제가 없었다면 임금피크제가 아예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 정년연장형 임금피크 유효성은 인정될 듯
그간 주로 공기업의 임금피크제 유효성과 관련한 소송들이 있었다. 법원은 대부분 정년유지형과 정년연장형을 불문하고 임금피크제의 유효성 자체를 인정해왔다. 법원도 호봉임금 문제를 충분히 고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정년연장형이라도 임금 조정을 정년 연장 시점보다 훨씬 이른 44세부터 삭감한 한 민간기업의 임금피크제에 대해선 무효라 판단한 바 있다. 이번 대법원 판결 역시 정년유지형이지만 임금피크 대상자의 실적이 더 높고 임금 삭감의 불이익이 큰 상태에서 임금피크제에 따른 보상 조치가 없어 무효라고 판단했다. 이 사례들은 아주 예외적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번에 대법원이 제시한 도입 목적의 정당성 등 임금피크제 유효성 판단 기준은 향후 보다 엄격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정년유지형에 대해서는 면밀한 판단을 기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는 원칙적으로 유효하다고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고령자고용법상 임금체계 개편 등은 정년 연장은 물론이고 호봉임금과도 교환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개별 기업 노사는 시행 중인 임금피크제를 차분히 점검할 필요가 있다. 정부 역시 섣부른 소송이 남발되지 않도록 충분한 설명에 나서야 한다.
새 정부는 세대상생형 임금체계 개편을 국정과제로 채택했다. 그러나 민간기업의 임금체계 개편을 노사 자율에 맡기고 성과를 기대하기는 너무 요원하다. 임금의 결정은 노사 자율로 정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호봉임금을 노사 자율로 개편하도록 무한정 기다리는 것은 시장의 문제를 방치하는 것과 다름없다.
적어도 정부가 노사 자율로 임금체계 개편에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이나 여건을 조성해줘야 한다. 현 호봉임금 체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노사도 잘 알고 있다. 더 늦기 전에 임금체계 개편을 위한 사회적 대화와 국민적 공론화를 시도함으로써 노사 논의가 시작될 수 있는 제도적 여지를 만드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이상희 한국공학대 지식융합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