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금 낸 선열 후손 찾기… 기탁자 6명 후손 찾아 도산 안창호와 함께 흥사단 활동한 문일민, 단원들과 타향서 42전씩 모아 본보에 보내 손녀 “가족도 몰랐던 조부 흔적 찾아 감사” 의열단 이끈 김관제 1931년 성금 2원 기록… 대구상원고 재학생들도 16원30전 기부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낸 독립운동가 문일민(왼쪽 사진 가운데)이 1930년 두 아들과 함께 찍은 사진. 오른쪽 사진은 김원봉과 함께 의열단을 이끈 독립운동가 김관제. 항일운동에 나선 이들은 그 상징과도 같은 충무공 위토가 1931년 경매 위기에 처하자 성금을 모아 동아일보에 보냈다. 독립기념관·김병국 씨 제공
‘중국 상하이(上海) 샤페이(霞飛)로 1014롱(弄) 30호에서 문일민이 42전을 보냅니다.’
1931년 “충무공 위토(位土·묘소 관리비를 조달하기 위한 토지)를 지켜 달라”는 내용의 편지와 성금봉투가 동아일보에 전해졌다. 봉투에 적힌 상하이 주소는 도산 안창호(1878∼1938)가 1913년 세운 항일 민족운동단체 흥사단의 상하이지부 은신처. 봉투에는 도산과 문일민을 비롯한 흥사단원 30명이 타향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각각 42전씩 애써 모은 성금이 담겼다.
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는 일제강점기 경매 위기에 처한 충무공 위토를 지키기 위해 민족성금을 기탁한 선열의 후손을 찾고 있다. 현재까지 기탁자 6명의 후손을 확인했다. 현충사관리소는 올해 현충사 중건 90주년을 맞아 후손들에게 감사패를 전할 계획이다.
문일민은 1919년 3·1운동 직후 만주로 망명했다. 그 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내며 독립운동을 펼쳤다. 1920년 8월 2일 미국 국회의원단의 경성 방문 당시 일제의 평남 경찰부 담을 폭파한 뒤 상하이로 탈출했다. 그의 아내 안혜순도 남편을 따라 애국부인회 활동을 펼쳐 201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할아버지, 할머니 모두 돌아가시고 최근 아버지마저 치매에 걸리셔서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잃어가고 있어요. 우리 가족도 미처 몰랐던 할아버지의 흔적을 찾게 돼 감사합니다.”
대구에 사는 김병국 씨(86)도 10일 기탁자 명단에서 부친의 이름을 발견했다. 그의 아버지는 약산 김원봉(1898∼1958)과 함께 무장 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을 이끈 월강(月岡) 김관제(1886∼1951). 기탁자 명단에는 월강이 1931년 성금 2원을 동아일보에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월강은 1917년 12월 의열단원들과 함께 일제 관청을 폭파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국내로 폭탄을 운반하던 중 일본 헌병에 체포돼 수년간 옥살이를 했다. 귀국 후에는 대구에서 한의사로 지내며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이육사(1904∼1944)에게 독립자금을 지원했다.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하다 대구형무소에서 광복을 맞았다. 정부는 1990년 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아버지께서는 늘 당신 몫까지 떼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내주셨어요. 어릴 적 어머니가 고생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때도 있었죠. 하지만 아버지가 계셨기에 지금 이 나라가 있다는 걸 이제는 압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