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프 페탱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가 패전하자 나치에 부역한 비시 정권의 수반을 지냈다. 만년이 정말 좋지 않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때는 프랑스를 구한 최고의 전쟁영웅이었다.
베르됭 전투가 위기에 빠졌을 때, 페탱이 구원자로 투입됐다. 그는 1차대전을 지옥으로 만든 맹목적인 돌격전술을 혐오했다. 그가 찾아낸 대안은 포병을 이용한 화력전이었다. 전투 초기에 독일군은 독일군답게 정밀한 포격 계획을 세워 프랑스군 진영을 초토화했다. 페탱은 우왕좌왕하던 포병을 다잡고, 화력을 증원하고, 체계적인 집중 포격으로 독일군에 악몽을 되돌려 주었다.
화력전으로 전환되자 포탄 조달이 관건이 되었다. 페탱은 프랑스 전역을 뒤져 트럭과 가용한 운송수단을 다 끌어모아 3500대의 차량을 마련했다. 그런데 도로가 없었다. 베르됭으로 오는 철도와 도로는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독일군의 포격으로 다 절단되었다. 단 하나의 도로만 남아 있었다. 도로는 폭이 6.5m로 트럭 두 대가 간신히 비켜갈 수 있었다. 너비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도로의 내구성이었다. 부드러운 프랑스의 대지 위에 설치된 비포장도로는 엄청난 물량의 수송을 감당할 만큼 튼튼하지 않았다.
전쟁에서 도로는 말 그대로 생명선이다. 도로를 통해 누가 얼마나 빨리 대량으로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느냐가 승패를 좌우하지만 이들의 공로는 곧잘 잊혀진다.
임용한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