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저명한 분석가가 이렇게 말합니다. 분석하는 사람의 마음을 분명히 안다고 생각한 순간, 분석에 걸림돌이 생긴다. 오래 보아 온 그 사람을 오늘도 나는 처음 만난 사람처럼 새롭게 들으려 한다. 또 다른 분석가는 아래와 같이 주장합니다. 마음을 제대로 읽으려면 내가 너무 자주 질문을 던져서 말의 흐름을, 자유연상을 끊어내면 안 된다. 질문이 마음의 공간을 닫기 때문이다. 분석의 핵심이라는 분석가의 해석도 조급하게 이루어지면 마음이 열려서 탐색될 가능성이 연기처럼 사라집니다. 마음 다루기는 정말 미묘합니다.
마음을 다루는 경험이 쌓이면서 ‘확신’이나 ‘신념’이라는 마음의 입장에 무조건 동의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스스로 의심하지 않는 신념은 자신에게, 남에게 위험하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우리는 불확실한 것을 싫어합니다. 그것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복잡한 문제도 단순화시키면 고민이 필요 없고, 마음이 가벼워지고, 즐겁기까지 합니다. 단순화시키는 가장 쉬운 방법은 둘로 나누는 겁니다. 흑과 백처럼. 그러면 확실하고 선명하게 보입니다.
나누는 일은 매력적입니다. 불확실한 것이 확실한 것으로, 이해가 쉽게 되는 것으로 바뀝니다. 특히 경쟁이 심한 사회에 살면서 마음이 불안하거나 위협받고 있다고 느낄 때 나누어서 확실하게 만들면 안심이 되고 걱정이 줄어듭니다. 그 일에 참여해서 내 몫을 하고 있다면 자존감도 올라갑니다. 시키지 않아도 일어나 저항하고 싸웁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결속과 연대로 이어집니다. 내 선택이 흔들리는 일은 없어야만 합니다. 이제 내 신념인지 남이 선동한 결과물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반대편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불필요합니다! 신념은 확장시켜야 합니다. 친구의 적, 적의 친구 모두 선이 아닌 악으로 간주합니다.
우리는 일관성이 있는 삶을 원합니다. 자기모순에 빠져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일관성에 금이 가기 때문입니다. 과학의 영역에서, 자석의 같은 극끼리는 서로 밀어내고 다른 극끼리는 붙으려 하지만, 정치 영역에서는 놀랍게도 정반대 현상이 일어납니다. 다르면 밀어냅니다. 미워하다가 닮는 경우도 흔히 있으나 눈을 감고 부정합니다. 위로와 위안을 달콤하게 제공하는 신념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신념 앞에서 대화, 토론은 무력합니다. 말은 그저 신념을 지키는 방편입니다. 소통이 내 신념을 흔들 것이 두려우면 말로 말을 뒤집습니다. “솔직하지 않다”에 “융통성이 있다”고 반박합니다. ‘충동적’에는 ‘배짱’이라고 대응합니다. ‘이기적’에는 ‘독립적’, ‘교활함’에는 ‘현명함’, ‘탐욕적’에는 ‘자수성가형’으로, “분열을 초래한다”에는 “선과 악을 분명히 구분한다”고 버팁니다. ‘비겁함’이 ‘신중함’으로 둔갑합니다.
‘대화’가 대립이라는 교착 상태에 빠지면 성을 내거나 위협하는 것으로 마무리합니다. 속으로는 대치 상태를 즐길 겁니다. 위협 그리고 보복은 이미 강력한 정치적 도구로 등장했습니다. 분열과 불화의 조장도 그러합니다. 참지 못하고 성을 잘 내는 성격이 인간적인 장점으로 통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그런 것과 그럴 것이라고 믿는 것 사이에 틈이 너무 벌어지면, 반대편을 이해하려는 힘은 마비됩니다. 우리 편의 주장에 합치하는 말들을 무조건 믿어버리면서 신념을 지킵니다. 문제의 배경, 맥락을 균형 잡힌 시각으로 파악하려고 쏟는 시간보다 같은 편과 연대를 튼튼하게 만들고 소속감을 강화하는 데 더 긴 시간을 씁니다. 진실은 궁금하지 않습니다. 나는 선이어야 하고 그들은 악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논란은 낭비이고, 선택은 숭고합니다.
나누면 분명하고 쉽습니다. 분명하면 편안합니다. 다 이해가 되는 듯한 착각, 편견, 오해일 수도 있지만 너무나 편안해서 그냥 그대로 좋습니다. 고민은 그저 불편할 뿐입니다.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