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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어린이들 목숨 앗아간 총격참사에도 “총기 판매 매진”[글로벌 현장을 가다]

입력 | 2022-06-23 03:00:00

미국 버지니아주 전미총기협회(NRA) 박물관에 전시된 구형 소총과 권총들. 이 박물관에는 17세기부터 현재까지 생산된 총기 약 3000점이 전시돼 있다. NRA를 비롯해 총기 규제 강화에 반대하는 미국인들은 “(총기로) 스스로를 지키는 권리”는 헌법이 규정한 신성한 권리이므로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버지니아=문병기 특파원 weappon@donga.com

워싱턴 문병기 특파원


《16일(현지 시간) 미국 버지니아주 전미총기협회(NRA) 박물관. 미국의 첫 영국 식민지 제임스타운에서 사용된 총기부터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 사용한 권총, 미 공화당이 최고의 대통령으로 꼽는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소총을 비롯해 총기 약 3000점을 전시하는 이곳은 평일 오전인데도 관람객 10여 명이 관람 투어를 하고 있었다.》




투어 진행자는 미 독립혁명 지도자 패트릭 헨리 초상화 앞에서 “그는 ‘가장 큰 목표는 모두가 총을 갖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독립 이후 지나치게 강력한 연방 정부를 지배하는 독재자의 출현을 두려워한 미국인은 권리장전(Bill of Rights·수정헌법)으로 스스로를 지킬 권리를 헌법에 담았다”고 했다. 중년의 관람객은 ‘서부극 대부’로 불렸던 영화배우 존 웨인을 언급하며 “우리 세대는 존 웨인을 보고 자라 어릴 때부터 총을 알았다. 스스로를 지킬 권리를 포기하라니 요즘 사람들은 미쳤다”고 말했다.
“스스로 지킬 권리 포기 못해”
관람객 중에는 할머니와 함께 온 어린이들도 있었다. 한 아이는 1960년대 어린이 방을 재구성해 놓은 전시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전시장 가운데 자리한 침대 위에는 커다란 소총과 총기 관련 잡지들이 놓여 있었다. 할머니는 아이에게 “저기 보이스카우트 잡지 보이니? 예전엔 총 쏘는 법을 배우고 싶어서 보이스카우트에 가입하는 애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전시관 직원 마이클 루피 씨는 최근 미국에서 총기 규제 논란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이달 들어 관람객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루피 씨는 “전시관은 NRA 회원 기부로 운영된다. 여기 있는 총들도 대부분 회원들이 기부한 것”이라며 “어린이들도 단체 관광으로 많이 찾고 있다”고 했다.

미 뉴욕주 버펄로와 텍사스주 유밸디에서 벌어진 무차별 총기 난사 사건으로 미 의회에선 총기 규제 논의가 한창이다. 초등학생을 비롯해 수십 명이 숨진 사건으로 총기 규제를 요구하는 시위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미 전역에서 이달에만 무차별 총격 사건 46건이 벌어지는 등 총기 사건은 오히려 늘고 있다. 의회에서 추진하는 총기 규제에도 허점이 적지 않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인종·혐오 범죄 급증으로 위협을 느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총기 구매가 늘어나는 등 총기 판매도 크게 증가하고 있다.
총격 사건에도 총기 구입 급증
지난달 10대 백인 우월주의자가 슈퍼마켓에서 소총을 난사해 흑인 10명이 숨진 뉴욕주 버펄로 사건 직후 뉴욕주 의회는 이달 2일 반자동 돌격소총 구입 가능 연령을 18세에서 21세로 올리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반자동 소총을 살 때 허가증을 제출하도록 했다. 캐시 호컬 주지사는 “총기범죄는 이 나라를 찢어놓고 있는 전염병”이라며 “뉴욕주는 우리 주민을 지키기 위한 담대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 법안이 통과된 직후 뉴욕주에선 오히려 총기를 구매하려는 사람이 늘고 있다. 뉴욕주 시러큐스 총기 판매상 팀 넬슨 씨는 지역 매체 인터뷰에서 “정부가 총기 판매에 대해 얘기할 때마다 우리 가게는 매진”이라며 “모두가 모두를 무서워하고 있고, 사람들은 가장 먼저 총기를 구입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초등학생 19명 등 21명이 사망한 유밸디 사건이 벌어진 텍사스주 주도(州都) 오스틴 의회도 17일 소총 구입 연령을 18세에서 21세로 높이는 권고안을 승인했다. 텍사스주 브라이언의 총기 판매상 베리 버딧 씨는 지역 방송국에 “총기 사건 이후 반자동 소총 등의 판매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총기 판매점들이 진행하는 총기 훈련 참여자도 미 전역에서 급증했다. 콜로라도주의 한 총기 훈련센터는 유밸디 사건 이후 훈련 과정 등록자가 그 전주보다 60% 늘었다.
총기 규제 풍선효과 커져

미국 버지니아주 전미총기협회(NRA) 박물관에 꾸며진 어린이 방. 침대 위에 커다란 소총이 놓여 있다. 버지니아=문병기 특파원 weappon@donga.com 

과거에도 미국에서는 대형 총기 난사 사건 직후 총기 판매가 늘어났다. 미 연방수사국(FBI)에 따르면 코네티컷주 샌디훅 초등학교에서 초등학생 20명 등 26명이 무차별 총격으로 숨진 ‘샌디훅 사건’이 일어난 2012년 12월에도 미 전역에서 총기 278만 정이 팔려 전년도 같은 달보다 50%가량 판매가 증가했다. 복지시설 총격으로 14명이 숨진 2015년 12월 샌버나디노 사건 직후에도 총기 판매는 전년도 같은 달보다 43% 늘었다.

대형 총격 사건이 터지면 총기 규제 논의가 활발해지지만 총기 판매는 급증하는 풍선효과가 반복되는 것이다. 총기 규제를 강화해도 미국인 상당수가 총기를 이미 소유한 상황에서 자신이 언제든 무차별 총격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그동안 총을 갖고 있지 않던 사람들이 앞다퉈 총기 판매점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조지타운대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3분의 1은 총기가 있다고 답해 적어도 미국인 8100만 명은 총기를 소유하고 있을 것으로 추산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늘어나고 있는 인종·혐오 범죄도 총기 구입 증가의 배경이다. 체포 과정에서 백인 경찰의 무릎에 목이 눌려 비무장 흑인 남성이 숨진 ‘조지 플로이드 사건’ 직후인 2020년 6월엔 총기 393만 정이 팔려 당시 기준으로 월간 최고 판매기록을 갈아 치우기도 했다. 전미사격스포츠재단(NSSF)에 따르면 조지 플로이드 사건 이후 미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총기 판매는 58% 늘어났다.

총기규제법 합의했지만…
버펄로와 유밸디 사건 이후 미국 내에서 모방범죄가 크게 늘어나는 등 총기범죄에 대한 불안감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총기범죄 기록보관소에 따르면 이달 들어 미 전역에선 6일과 13, 14일 등 사흘을 제외하면 매일 총기 난사 사건이 벌어졌다. 20일까지 벌어진 총기 난사 사건은 모두 46건으로 하루 2.3건꼴로 대형 총기 사건이 일어난 셈이다.

미 의회가 총기규제법안에 합의했지만 늘어나는 총기 사건을 막기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 법안은 총기를 구입하려는 18세 이상 21세 미만의 신원 조사를 확대하고 가정폭력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이의 총기 소유를 금지하는 등 총기 구입 규제를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 위험인물의 총기 소유를 제한하는 이른바 레드플래그(red-flag)법을 도입하는 주정부에는 지원금을 주는 내용이 포함된다.

하지만 총기 부품을 따로 산 뒤 조립해 만들어 추적이 되지 않는 ‘고스트건(ghost gun)’ 단속 방안이 담기지 않는 등 허점이 적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고스트건은 이미 적어도 2만 정 이상 유통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21일 메릴랜드의 한 중학교에선 13세 학생이 탄알이 든 고스트건을 들고 학교에 갔다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다.

문병기 워싱턴 특파원 weapp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