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교 등대’ ‘구로 등대’ ‘오징어잡이 배’. 경기 성남시 분당구나 서울 구로구에 위치한 게임업체 빌딩들은 한때 이렇게 불렸다. 촉박한 게임 출시 일정을 맞추려면 밤샘근무가 예사여서 늘 새벽까지 불이 켜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8년 7월부터 단계적으로 주당 근로시간이 52시간으로 단축된 뒤 오후 7시면 건물에 불이 꺼진다. 한국 게임업체들이 한 해 내놓는 신작 게임의 수와 출시 속도도 급감했다.
▷어제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노동시장 개혁 추진 방향’이란 제목으로 브리핑을 하면서 “주(週) 최대 52시간제의 기본 틀 속에서 운영 방법, 이행 수단을 현실에 맞게 개편하겠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공약인 ‘주 52시간 근무제 유연화’에 시동을 걸겠다는 신호다. 지금은 주 단위인 근로시간 규제가 노사 합의를 통해 월 단위로 바뀌고, 1∼3개월로 돼 있는 선택적 근로시간제 정산 기간도 연장될 가능성이 있다.
▷주 52시간제 운영이 유연해지면 기업들은 인력 운용에 다소 숨통이 트이게 된다. 신제품 출시를 앞두고 핵심 인력의 업무가 급증하는 반도체 등 첨단산업이나 게임 분야의 기업, 에어컨 생산·설치 등 계절성이 강한 기업들이 특히 반길 만한 변화다. 반면 소규모 게임업체 근로자들은 새로운 게임을 내놓을 때마다 회사에서 숙박하며 일하는 이른바 ‘크런치 모드’가 다시 시작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을 하고 있다.
▷한국은 선진국 중 연간 근로시간이 제일 길어 줄일 필요가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중국 등 후발국과 경쟁도 포기할 수 없는 처지다. 중국 노동법상 법정 근로시간은 하루 8시간, 주 44시간이지만 많은 중국 기업들이 ‘996(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주 6일 근무) 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기업들과 경합하려면 일이 몰릴 때 집중적으로 일하고, 나중에 그만큼 쉴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1년 단위 총 근로시간 안에서 기업과 근로자가 협의해 근무 형태를 조정하는 일본, 프랑스의 제도를 참고할 만하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