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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박중현]‘주 52시간 근로’ 숨통 트기

입력 | 2022-06-24 03:00:00


‘판교 등대’ ‘구로 등대’ ‘오징어잡이 배’. 경기 성남시 분당구나 서울 구로구에 위치한 게임업체 빌딩들은 한때 이렇게 불렸다. 촉박한 게임 출시 일정을 맞추려면 밤샘근무가 예사여서 늘 새벽까지 불이 켜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8년 7월부터 단계적으로 주당 근로시간이 52시간으로 단축된 뒤 오후 7시면 건물에 불이 꺼진다. 한국 게임업체들이 한 해 내놓는 신작 게임의 수와 출시 속도도 급감했다.

▷어제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노동시장 개혁 추진 방향’이란 제목으로 브리핑을 하면서 “주(週) 최대 52시간제의 기본 틀 속에서 운영 방법, 이행 수단을 현실에 맞게 개편하겠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공약인 ‘주 52시간 근무제 유연화’에 시동을 걸겠다는 신호다. 지금은 주 단위인 근로시간 규제가 노사 합의를 통해 월 단위로 바뀌고, 1∼3개월로 돼 있는 선택적 근로시간제 정산 기간도 연장될 가능성이 있다.

▷주 52시간제 운영이 유연해지면 기업들은 인력 운용에 다소 숨통이 트이게 된다. 신제품 출시를 앞두고 핵심 인력의 업무가 급증하는 반도체 등 첨단산업이나 게임 분야의 기업, 에어컨 생산·설치 등 계절성이 강한 기업들이 특히 반길 만한 변화다. 반면 소규모 게임업체 근로자들은 새로운 게임을 내놓을 때마다 회사에서 숙박하며 일하는 이른바 ‘크런치 모드’가 다시 시작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을 하고 있다.

▷정보기술(IT), 금융 등 연봉이 높은 업계 관계자들은 정부 개혁안 중 ‘화이트칼라 이그젬프션(White-collar Exemption)’ 도입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일정 연봉 이상 전문직에게 근로시간 규제를 적용하지 않는 제도로, 미국에선 연봉 13만4004달러(약 1억7400만 원) 이상 근로자는 연장근로 시간에 제한이 없다. 네이버 직원 평균연봉은 작년 1억2915만 원에서 올해 10% 인상됐고, 카카오는 작년 1억7200만 원에서 올해 15%가 올랐다. 미국 기준으로 봐도 상당수 직원이 대상이 될 수 있다.

▷한국은 선진국 중 연간 근로시간이 제일 길어 줄일 필요가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중국 등 후발국과 경쟁도 포기할 수 없는 처지다. 중국 노동법상 법정 근로시간은 하루 8시간, 주 44시간이지만 많은 중국 기업들이 ‘996(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주 6일 근무) 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기업들과 경합하려면 일이 몰릴 때 집중적으로 일하고, 나중에 그만큼 쉴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1년 단위 총 근로시간 안에서 기업과 근로자가 협의해 근무 형태를 조정하는 일본, 프랑스의 제도를 참고할 만하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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