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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단체 대동단 이끈 김가진, 독립운동가로 재평가할 때”

입력 | 2022-06-24 03:00:00

서거 100주년 맞아 학술대회
대한제국 대신서 임정 고문으로
대동단 총재 활약, 집중감시 받아
일제서 작위 받아 친일파 오명



동농 김가진의 생전 모습. 이규수 교수 제공


‘그는 조선 독립을 뜻하는 사람에게 공경 받았으며 중국 상하이로 건너간 이후의 고생은 극도에 이르러 하루 한 끼를 먹지 못해 추위가 극에 다다른 가운데 세상을 마쳤다.’

1922년 7월 7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동농(東農) 김가진(1846∼1922)의 부고 기사다. 그는 대한제국 대신 출신으로 항일운동을 펼친 독립운동가다. 양반가에서 태어나 판사대신주일공사(辦事大臣駐日公使)로 활동했다. 국권 침탈 후에는 1919년 4월 항일 비밀결사단체 대동단(大同團)을 조직하고 같은 해 10월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듬해 대한민국임시정부 고문을 맡아 굶주리면서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조선민족대동단기념사업회는 올해 김가진 서거 100주년을 맞아 그의 독립운동 활동을 조명하는 학술대회를 23일 열었다. 기념사업회장인 장명국 내일신문 대표는 개회사에서 “김가진 선생은 대한제국 대신이었기에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친일파라는 오명을 쓰게 됐다. 구한말 일본통 외교관이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선생을 재평가할 때”라고 말했다.

1919년 11월 13일 일본 조선주둔군이 김가진을 감시하며 작성한 보고서에는 그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협력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당시 그의 나이 73세였다. 이규수 교수 제공

이날 이규수 일본 히토쓰바시대 한국학연구센터 교수는 ‘제국 일본의 동농 김가진 인식’ 논문에서 1919년 일제가 작성한 ‘상하이 지역 불령선인(不逞鮮人) 조사보고서’를 입수 분석했다. 이에 따르면 동농은 일제가 감시하는 독립운동가였다. 1919년 11월 13일 일본 조선주둔군은 ‘김가진 부자가 11월 초 상하이에 와서 임정 사람과 협의하며 3만 청년을 규합하고 있다. 그들은 역정(逆政) 밑에서 노예생활을 보내기보다 독립군 깃발 아래 깨끗이 죽자는 선동적 언사를 일삼고 있다’는 내용의 문건을 총리대신에게 보고했다. 특히 이 보고서는 김가진을 ‘종래 독립운동에 관계한 자’라고 지칭했다.

1920년 5월 작성된 ‘비밀결사 대동단원 검거 문건’에는 ‘대동단이 김가진을 두령(頭領)으로 갖가지 음모를 기획하고 있다. 이들은 이제 혈전을 준비해야 한다는 선동적 기고문을 발표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독립운동가 최익환(1889∼1959), 박영효(1861∼1939) 등과 함께 조직한 대동단은 ‘일본이 한국을 독립시키지 않으면 혈전이라도 벌이자’는 포고문을 배포하며 국내외 독립 여론을 고취시킨 항일 운동단체다. 이 교수는 “1919년 상하이로 망명해 대동단 총재와 임정 고문을 지낸 경력은 동농의 항일운동 이력을 뒷받침한다”고 말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는 “제국의 귀족이 임정에 몸담으며 일제에 치명타를 가했으며 구한말 백성이 대한민국 시민으로 거듭나는 전형을 보여줬다”고 평했다.

장명국 기념사업회장이 선생의 일생을 조명한 ‘대동단 총재 김가진’(석탑출판) 출판 기념회도 이날 함께 열렸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