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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매너가 인간을 만들고 공간은 매너를 바꾼다

입력 | 2022-06-25 03:00:00

◇보이지 않는 도시/임우진 지음/316쪽·1만6500원·을유문화사




국회의원 수가 300명인 한국 국회의사당의 대회의장 면적은 950㎡로, 의원 수가 577명에 달하는 프랑스 국회의사당 대회의장(545㎡)보다 넓다(위 사진). 계단식 의자가 설치된 프랑스 국회의사당(가운데 사진)은 2층에 시민 방청석을 둬 시민이 국회를 감시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했다. 영국 하원의사당은 면적이 비좁아 목소리뿐 아니라 몸짓과 손짓까지 활용해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나눌 수 있는 구조다. 을유문화사 제공

왜 우리나라 국회는 몸싸움을 벌이는 ‘동물 국회’가 되거나 아예 일하기를 멈추는 ‘식물 국회’가 되곤 할까. 건축가인 저자는 사람이 아닌 공간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영국 하원의사당은 테이블을 중앙에 놓고 양당이 마주 본 채 다닥다닥 붙어 앉는 비좁은 구조라 마이크 없이도 서로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오페라극장을 닮은 프랑스 국회의사당은 계단식 의자가 설치돼 앞사람이 하는 일을 뒷사람이 볼 수 있다. 한국 국회의사당은 정반대다. 의원 수 대비 1인당 면적이 3.16m²로 프랑스 국회의사당(0.94m²)보다 훨씬 넓은 데다 의자마저 띄엄띄엄 떨어져 있다. 상호 감시체계가 다른 나라와 비교해 느슨하고, 상대방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가 어려운 구조라는 것이다.

이화여대 캠퍼스 복합단지(ECC)를 설계한 건축가로 유명한 저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도시공간의 비밀을 풀어낸다. “우리는 공간을 만들고 공간이 우리를 만든다”는 윈스턴 처칠의 말을 빌려 도시공간이 우리 삶의 방식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밝힌다. 프랑스에서 유학하며 유럽 여러 도시를 여행한 덕에 파리 등 대도시와 한국 도시공간을 비교분석한 사례가 풍부하게 담겼다.

도시구조는 한 사람은 물론 공동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왜 무수히 많은 한국 운전자들은 프랑스, 독일 등과 달리 차량 정지선을 지키지 않을까. 성격 급한 한국인의 특성 탓으로 접근하면 바뀌는 건 없다. 저자는 다른 데에서 해답을 찾는다. 많은 이들이 같은 잘못을 저지른다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의 문제이지 않을까. 유럽에서는 차량 신호등이 정지선 바로 앞에 설치돼 있다. 운전자가 정지선을 넘어가면 차량 신호를 볼 수 없기에 법을 지킬 수밖에 없는 구조다. 반면 한국은 횡단보도 너머에 신호등이 설치돼 있다. 운전자가 정지선을 넘어 횡단보도를 침범해도 교통신호를 확인하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다. 운전자 처벌수준을 강화하는 것보다 차량 신호등 위치를 바꾸는 게 사고를 줄이는 근본 해법인 셈이다.

도시공간은 때로 삶의 방식을 바꾼다.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건축가 우대성이 2013년 부산 서구에 지은 보육시설 수국마을 사례를 풀어낸다. 요양병원처럼 생긴 복도식 건물에서 살던 100명의 아이들은 규율에 따라 살아갈 뿐, 제 삶의 주인이 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새 보육시설을 지어달라는 의뢰를 받은 우대성은 오랜 고민 끝에 옛 건물을 완전히 허물고 그 위에 조그마한 집 여러 채가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을 지었다. 공간이 바뀌자 아이들의 일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집과 마을의 주인이 된 아이들이 스스로 집안일을 분담하고 집을 가꾸며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법을 터득해 나간 것이다.

“시민이 도시의 주인이 돼야 한다”는 저자의 건축 철학도 눈길을 끈다. 그는 시민을 도시의 주인으로 만드는 변화는 아주 작은 데서 출발한다고 강조한다. 1923년 파리 시당국은 튈르리 정원에 고정된 벤치를 놓는 대신 누구나 손쉽게 위치를 바꿀 수 있는 녹색 철제 의자 수백 개를 마련했다. 제각각 다른 방향, 다른 위치에 놓여 멀리서 보면 무질서해 보이지만 의자 위에 누워 일광욕을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은 제 집처럼 편안해 보인다. 어쩌면 의자 하나, 신호등 하나, 건물 하나에 깃든 건축가의 철학이 도시의 풍경을 이처럼 새롭게 바꿔왔는지도 모르겠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