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포럼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과 만난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 러-독 천연가스 송유관 건설을 적극 추진했던 슈뢰더 전 총리는 퇴임 후 러시아 최대 국영 석유회사 이사장을 맡는 등 친러 행보를 보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AP 뉴시스
신광영 국제부 차장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는 ‘석유 앞에 장사 없는’ 국제 질서가 녹아있는 길이다. 1970년대 중동이 담합해 유가를 올린 ‘오일쇼크’의 위력을 실감한 우리는 당시 주요 산유국인 이란과 가까워지려 했다. 서울시는 이란의 테헤란시장을 초청해 자매결연을 맺고 서울엔 테헤란로를, 테헤란에는 서울로를 만들었다.
박정희 정권이 1973년 미국의 만류에도 “이스라엘은 점령 지역에서 철수하라”는 친아랍 성명을 낸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당시 이스라엘이 미국을 등에 업고 아랍국들과 영토 분쟁 중인 상황에서 우리가 산유국인 아랍 쪽 편을 든 것이다. 일본도 성명에 동참했다. 아무리 가까운 혈맹이라도 석유 앞에선 후순위인 것이다.
20세기 이후 대부분의 전쟁에서 석유는 승패의 결정적 변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이 미국 진주만을 공습한 것은 석유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은 일본이 동남아 석유 운송로를 확보하려 인도차이나를 침공하자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을 금지시켰다. 일본은 이를 풀기 위해 진주만을 기습했는데, 보복에 나선 미국이 일본의 원유 수송선을 대거 침몰시켰다. 일본은 원유 부족에 허덕이다가 패망으로 내몰렸다.
에너지를 쥔 쪽이 유리한 것은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도 다르지 않다. 요즘 우리는 전쟁을 일으켜 전 세계를 위기로 내몬 러시아가 나 홀로 승승장구하는 아이러니를 목도하고 있다. 다른 나라들은 고유가 고물가에 신음하는데, 러시아는 천연가스와 원유 수출로 호황을 누리고 있다. 그 돈으로 우크라이나에 미사일과 포탄을 퍼붓는다.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나라가 독일이다. 독일은 2월 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에 가장 많은 돈을 보낸 서방 국가다. 3, 4월 두 달간 지급한 에너지 대금만 11조3000억 원(83억 유로)이다. 독일은 천연가스의 55%, 석탄의 52%, 석유의 34%를 러시아에서 수입한다. 전체 에너지원 중 약 25%가 러시아산이다.
독일은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원전 폐기를 선언했고 석탄발전도 줄이면서 풍력 태양력 등 재생에너지 비율을 전체 전력의 40% 가까이 높여 왔다. 그로 인한 전력 생산의 공백은 러시아 에너지로 메웠다. 독일을 수식해온 ‘신재생에너지 강국’은 러시아 에너지 중독이라는 치명적 결함 위에 세워진 허망한 명성이었던 것이다.
독일의 러시아 에너지 수입은 좋은 명분에서 시작됐다. 냉전이 한창이던 1970년대 빌리 브란트 총리는 소련과의 경제 교류를 통해 긴장을 완화한다는 동방정책을 추진했다. 후임인 헬무트 슈미트 총리도 “무역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총을 쏘지 않는다”며 에너지 수입을 늘렸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뒤이어 소련이 붕괴하자 독일 정치인들은 “상호의존 전략이 철의 장막을 걷어냈다”고 자평했다.
독일은 탈냉전 후 러시아 에너지 의존 상태를 바로잡을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블라디미르 푸틴이 2008년 조지아 침공, 2014년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병합 등 야욕을 드러낼 때도 독일은 러-독 천연가스 송유관 건설을 멈추지 않았다. 권위주의 국가를 변화시킨다는 자기만족, 탈탄소 선도국이 되겠다는 포부, 값싼 천연가스라는 눈앞의 달콤함에 현혹돼 안보 위기를 직시하지 않은 것이다.
러시아는 최근 독일로 보내는 천연가스를 60%나 줄였다. 비상이 걸린 독일은 가장 더러운 에너지인 석탄 발전소를 재가동하며 과거로 퇴행하고 있다. 러시아가 가스관을 완전히 잠그면 제조업 중심인 독일의 경제성장률은 5%포인트 하락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지금 독일은 러시아가 언제 물을 끓일지 몰라 속 태우는 ‘냄비 속 개구리’ 신세다. 설익은 이상주의가 에너지 정책을 좌우하면 어떤 대가가 따르는지 돌아보게 된다.
신광영 국제부 차장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