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모는 흔히 남성만의 고민의 여겨질 때가 많지만 여성들도 탈모로 속을 앓는 경우가 흔하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통계에 따르면 지난 2020년 탈모증 환자는 57만 5522명이었는데 그중 여성 환자는 24만 5939명이었다. 전체 환자의 약 43%에 달한다. 어디까지나 건강보험 적용 대상만 집계한 수치라 전체 탈모 인구를 다 반영하지는 못하지만 남성 탈모 못지않게 여성 탈모도 흔하다는 걸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친환경 화장품을 만드는 ‘피프틴디그리즈’ 정문정 대표는 이러한 사실에 주목했다. 가려움과 염증을 줄여주는 효과가 있는 곰취 추출물의 활용 방안을 고민하다 2040 여성 탈모 케어 시장의 존재를 깨달았다. 식물 유래 성분이라는 특징을 살리면서도 여성 소비자 성향에 맞춰 친환경, 비건 제품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렇게 곰취 자연주의 비건 샴푸를 표방하는 ‘곰푸’가 탄생했다.
피프틴디그리즈 정문정 대표. 출처=IT동아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와디즈에서 지난해 말, 올해 초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펀딩에서 1억이 넘는 금액이 모였다. 특히 앵콜에서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전체 모금액의 80% 이상이 앵콜 펀딩에서 모일 정도였다.
“오랜 세월 산업용 접착제만 다루다 보니 다른 분야에도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침 전 세계적으로 친환경 바람도 불었고요. 친환경 화장품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피프틴디그리즈의 곰푸 샴푸와 바디 에센스, 바디 클렌저. 제공=피프틴디그리즈
정 대표는 기존 화장품 시장에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선 확실한 특장점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기술 개발에 몰두했다. 그렇게 처음 탄생한 제품은 ‘고체 화장품’이었다. 기존 화장품에 함유된 다량의 물이 미생물 번식을 부르고, 이를 막기 위해 방부제를 넣게 된다는 점에서 착안해 만든 제품이다. 나름 신선한 발상의 전환이었기에 주목을 받을 수 있었고, 내친김에 미국 진출도 타진했다. 하지만 제품의 생소함 때문에 시장 안착에 어려움을 겪는 사이, 코로나19 사태가 터지면서 모든 게 멈췄다.
해외 사업을 중단한 사이, 정 대표는 국내로 눈을 돌렸다. 당시 고체 화장품에 활용한 성분 중 하나였던 곰취 추출물을 다른 방향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2018년 말부터 3년 가까운 세월을 시장 조사와 연구, 개발에 쏟아부었다. 1억 펀딩 신화 뒤에는 적지 않은 우여곡절이 있었던 셈이다.
샴푸에 이어 개발한 곰푸 바디 에센스는 다음 달 18일까지 와디즈에서 펀딩을 진행한다. 출처=IT동아
와디즈에서 성공적으로 펀딩을 마친 곰푸는 현재 쿠팡, 위메프, 네이버 스마트스토어 등으로 점차 판로를 넓혀가고 있다. 정 대표는 500만 팔로워를 보유한 대형 폐쇄몰에도 곰푸를 납품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이렇게 판로를 넓히는 과정에서 도움을 준 게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연구개발특구진흥재단의 과학벨트 기업 온라인 유통채널 입점 지원사업이다. 정 대표는 “지원을 받아 만든 상세 페이지와 홍보이 곰푸가 쿠팡에 제트배송으로 입점하는 데 큰 도움이 됐죠”라고 말했다.
피프틴디그리즈의 성공은 태백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할 수 있다. 정 대표는 곰푸에 쓰는 곰취는 태백산만 고집한다. 품질이 우수해 핵심 성분이라 할 수 있는 폴리페놀 함량도 높기 때문이다. 지난해 곰푸 생산에 곰취 1t(톤)을 사용했는데 올해는 이미 10t을 넘었다. 태백시 전체 산나물 생산량이 약 460여 톤이고 그중 곰취가 15~20%를 차지하는데, 그중 10t이니 상당량을 피프틴디그리즈가 소비하고 있는 셈이다. 농가 입장에서도 나물이 제철인 봄이 아닌 비수기에 곰취를 대량으로 사들이는 피프틴디그리즈는 고마운 존재다. 지난달 19일에는 태백시, 태백곰취영농조합법인과 함께 태백 곰취 유통 활성화를 위한 업무협약을 맺기도 했다. 시는 곰취 품질을 높이기 위해 농업인들을 지원하고, 조합은 고품질 곰취를 선별해 피프틴디그리즈에 공급하고, 피프틴디그리즈는 이를 이용해 샴푸를 만들어 국내외에 판매한다는 약속이다.
피프틴디그리즈 정문정 대표. 출처=IT동아
피프틴디그리즈는 태백 청년마을 만들기 프로젝트에도 참여한다. 인구 소멸 위기 지역인 태백에 청년들이 살기 좋은 마을을 조성하고 정착을 지원하는 프로젝트다. 7월부터는 이를 위한 체험 행사의 일환으로 태백 한 달 살기가 시작된다. 피프틴디그리즈는 여기에 곰푸 제품을 용기에 원하는 만큼 담아갈 수 있는 ‘리필 스테이션’을 설치할 계획이다. 또한 제빵을 하는 지역 활동가와 함께 곰취 추출액을 생산하고 남은 곰취 찌꺼기를 빵 재료로 재활용하는 방안도 연구 중이다.
정 대표는 국내에서 사업이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해외 진출도 다시 노리고 있다. 현재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호주에 제품 일부를 수출하고 있다. 다만 해외 화장품 시장의 높은 문턱을 경험한 만큼 이전과는 전략을 달리 할 생각이다. 제품보다는 곰취 추출물을 동결건조해 원료 시장을 공략할 계획이다.
정 대표는 곰취 추출물 외에도 다양한 식물 유래 화학물질을 연구해 연료를 개발하고, 이를 다시 상품화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제품 개발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 뒤늦게 방송통신대학에 늦깎이로 입학해 농학과 식물화학도 공부하기 시작했다. 피프틴디그리즈를 화장품 회사를 넘어선 피토케미칼(Phytochemical) 전문 기업으로 키우기 위한 발걸음을 차근차근 내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