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토권으로 실리 챙긴 에르도안
바이든과 마주 앉은 에르도안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지난달 29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가 개막한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터키) 대통령과 회담을 했다. 스웨덴과 핀란드의 나토 가입을 반대한 튀르키예가 하루 전 찬성으로 돌아서자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회담에서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마드리드=AP 뉴시스
스웨덴과 핀란드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이 기정사실화한 가운데 두 국가의 나토 가입을 반대하다 나토 정상회의 직전인 지난달 28일 지지로 돌아선 튀르키예(터키)가 실리를 톡톡히 챙겼다는 분석이 나온다. 두 나라의 나토 가입에 찬성해주는 대가로 숙원사업이던 미국 F-16 전투기 도입이 가시화됐다. 자국 내 분리독립 세력인 쿠르드족 문제와 관련해서도 스웨덴과 핀란드의 협조 약속을 받아냈다. 튀르키예 대통령실은 두 나라와 나토 가입 협상을 마친 뒤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었다”는 입장을 냈다고 이날 AFP통신이 전했다.
○ 튀르키예, 美 전투기 도입 가시화
튀르키예가 스웨덴 핀란드의 나토 가입을 반대하며 내세운 명분은 두 나라가 자국 내 쿠르드족 분리독립 세력을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나토 규정상 신규 가입은 기존 30개 회원국의 만장일치가 필요해 튀르키예가 반대를 고수하면 가입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에 스웨덴 핀란드는 자국 내에 있는 쿠르드노동자당(PKK), 시리아 연계 세력 등을 단속하고 튀르키예에 범죄인을 인도하는 관련 절차도 밟기로 튀르키예와 합의했다. 또 튀르키예가 2019년 시리아 내 쿠르드족 장악 지역에 군사 공격을 한 것에 책임을 물어 부과했던 무기수출 금지도 해제하기로 했다. 나토 가입 비토권을 지렛대 삼아 협조 약속을 끌어낸 튀르키예는 지난달 29일 두 나라에 PKK 등 반체제 인사 31명에 대한 송환을 요구하고 나섰다. 국제인권단체들은 “튀르키예가 무고한 민간인을 살해할 길이 열렸다”며 나토 결정에 반발하고 있다.
튀르키예가 미국으로부터 F-16 전투기 도입과 관련한 긍정적인 메시지를 끌어낸 것이 더 큰 수확이라는 시각도 많다. 튀르키예는 2019년 미국의 반대에도 ‘러시아판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로 불리는 S400 미사일을 들여온 뒤 미국산 전투기 수입이 금지돼 전투무기 현대화에 차질을 빚어왔다.
○ “튀르키예는 나토의 와일드카드”
나토 출범 3년 만인 1952년 가입한 튀르키예는 2014년 권위주의 정권인 에르도안 대통령 취임 전까지는 별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반정부 인사를 탄압하고 러시아와 가까워지면서 미국 및 유럽과 갈등을 빚었다. 이번에는 나토와 러시아 간 신냉전을 이용해 몸값을 최대한 높였다.리치 아우천 전 미 국무부 고문은 “튀르키예인들은 국익을 충족할 때까지 대세에 따르기를 거부해 나토의 의사결정을 복잡하게 만든다”면서도 “(나토와 튀르키예는) 상호 이익이 되는 정치·안보적 관계”라고 CNN방송에 말했다. 나토의 애를 태우던 튀르키예가 막판 러시아에 한 방 먹인 셈이 되자 미 CNN은 “튀르키예는 나토의 ‘와일드카드’가 됐다”고 평가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번 나토 합의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자국 내 정치적 입지 강화에 활용할 승리를 안겨줬다”고 평가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70% 이상으로 치솟은 세계 최고 수준의 물가상승률 등 경제난으로 최근 지지율이 떨어진 상태다.
카이로=황성호 특파원 hsh033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