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민주당 정부가 이끌고 있지만 미국인들이 체감하는 현실은 어느 때보다 보수적이다. 1950년 이후 가장 보수적이라는 연방대법원이 낙태 총기 환경 같은 체감도 높은 문제에서 기존 판례와 정부 결정을 뒤집으며 미국 사회의 보수화를 이끌고 있다. 미국을 좌우하는 건 백악관도 의회도 아닌 연방대법원이란 말이 실감나는 때다.
▷보수 대 진보 대법관이 6 대 3인 연방대법원은 여성의 낙태권을 보장한 1973년 판결을 무효화한 데 이어 지난달 30일엔 정부에 온실가스 배출 규제 권한이 없다고 판결해 세계의 기후위기 대응에 찬물을 끼얹었다. 지난달 23일에는 공공장소에서 총기 휴대를 제한하는 뉴욕주의 총기규제법을 위헌이라고 했고, 21일엔 종교색 없는 학교만 지원하는 메인주의 교육정책에 위헌 판결을 내려 정교분리 원칙을 위반한 퇴행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과거 연방대법원은 법조문에 충실한 해석으로 사법 자제를 하는 전통이 있었지만 사회가 복잡해지고 분쟁이 늘자 약자 보호와 정의 실현 등을 명분으로 제도 개혁에 가까운 적극적 판결을 내놓기 시작했다. 진보적 사법 적극주의로 평가받는 시기가 얼 워런 대법원장의 대법원(1953∼1969년)이다. 미란다 원칙의 유래가 된 1966년 ‘미란다 대 애리조나’ 판결이 이 시기에 나왔다. 최근 연방대법원은 미란다 원칙을 지키지 않은 경찰을 시민이 고소할 권한은 없다고 판결하면서 범죄 용의자 인권 보호 노력도 후퇴시켰다.
▷보수 대법관들은 법문에 충실한 사법 소극주의에 가깝지만 지금의 대법원은 입맛에 맞는 법문만 취사선택해 의회와 행정부를 무력화한다는 점에서 보수적 사법 적극주의로 평가받는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연방대법원의 사법 통제를 견제하려면 의회가 대법관 탄핵권을 행사해야 한다거나, 대법관 수를 13명으로 늘리거나 종신제 대신 임기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제안이 나온다. 보수 대법관 6명의 평균 나이는 62세, 보수의 ‘여전사’ 배럿 대법관은 고작 50세다. 대법원 제도에 변화가 없다면 미국 사회의 우경화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