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에서 10리 안에 살게 하겠다.”
1810년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두 아들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당시 정약용은 신유박해(천주교 박해 사건)로 유배된 상태였다. 귀양 생활을 끝낸 뒤 자식들에게 한양 집을 마련해주겠다고 약속한 것. 정약용은 “조선은 (중국에 비해) 문명이 뒤떨어져서 한양에서 몇 십리만 멀어져도 원시사회”라며 “어떻게든 한양 근처에 살면서 문화의 안목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정약용은 또 “만약 한양 한복판으로 깊이 들어갈 수 없다면 잠시 근교에 살면서 과일과 채소를 심어 생활을 유지하다가 재산을 불린 후에 들어가도 늦지 않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정약용은 끝내 ‘인 서울’하지 못하고 현재의 경기 남양주시에 살았다.
최근 대중역사서 ‘우리는 투기의 민족입니다’(위즈덤하우스)를 펴낸 이한 작가(44)는 4일 동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서울에 중요한 정보가 몰리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며 “오죽하면 정약용도 아들에게 서울에 살게 하겠다는 이야기를 했겠나”고 했다. 신간은 조선시대 유행했던 부동산 투기와 재테크 일화를 다룬다.
“‘조선왕조실록’을 기본 자료로 삼았습니다. 조선시대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생생하게 기록한 ‘승정원일기’, 유명 인물들의 편지와 상소문을 참고해 당시 상황을 전하려 했어요.”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은 항상 사람으로 바글거렸다. 백성들은 더 좋은 일거리를 찾아 상업이 발달한 한양으로 몰려들었다. 양반들은 한양에서 열리는 과거를 쉽게 보기 위해, 더 좋은 정보를 얻기 위해 상경했다. 그러다 보니 항상 한양엔 집이 부족했다. 성균관 유생들은 하숙할 때 2인이 작은 방에 사는 게 보통이었다. 백성들은 집을 구하지 못해 풀과 가시나무로 엉성하게 가건물을 짓고 살았다.
부작용도 일어났다. 어영청 대장 윤태연(1709~1777)은 10칸 남짓 되는 집을 백성들로부터 빼앗아 30칸으로 잘라 세를 놓는 ‘쪽방 재테크’를 벌였다. 고위관리들이 백성들에게 제대로 된 보상을 하지 않고 집을 뺏는 ‘여가탈입’(閭家奪入)도 성행했다. 이 작가는 “집안 살림에 꾸준히 정성을 기울여 100만 평의 농장을 소유한 이황(1501~1570) 같은 모범적인 인물도 있다”며 “하지만 양반과 백성 가릴 것 없이 집을 구하지 못해 안달이 났던 건 사실”이라고 했다.
조선시대 투기 열풍을 조사하며 어떤 생각이 들었냐고 묻자 이 작가는 차분히 답했다.
“올 초까지 한국을 뒤흔든 부동산, 주식, 가상화폐 열풍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어요. 과거나 지금이나 성실하게 살아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투기가 성행하는 것 아닐까요.”
이호재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