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sight]
1982년 7월 6일 신한은행 창립 주주총회.
신한은행은 순수 민간 자본으로 만들어진 국내 첫 은행이다. 1982년 7월 설립 당시 지점은 3곳, 임직원 수는 279명으로 조그맣게 출발했다. 당시는 경제적으로 2차 오일 쇼크 등으로 경기 침체가 우려되는 때였다. 산업적으로 조흥 상업 제일 한일 서울은행이 금융계를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이제 막 만들어진 작은 은행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한발 더 뛰고 더욱 혁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직해 온 새 직장이 언제 망할지도 모르는 경쟁에 내몰리면서 구성원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럽게 은행과 본인의 운명을 동일시하는 문화가 생겼다. 더 많은 성과를 내기 위해 더 많이 노력하고, 현장을 중시하는 경향이 조직 문화로 자라났다. 이런 기업문화는 설립한 지 몇 년 되지 않아 ‘종합 온라인 시스템’을 은행권 최초로 개발하는 성과로 이어졌다. 또 1985년에 일본, 1989년에는 뉴욕과 런던에 해외 네트워크를 개설하는 성과도 냈다. 신한금융그룹은 1990년까지를 탄생기로 본다. 이 시기에 신한증권(1985년)과 신한생명(1990년)도 설립됐다.
국내 첫 무인점포 개설한 성장기 (1991-1996)
상인들을 위해 행원들이 ‘동전카트기’를 몰고 시장을 도는 모습.
전국적으로 부족한 점포망을 보완하기 위해 국내 처음으로 자동화 기기로만 이뤄진 무인점포를 만들었고, 국내 최초로 PC뱅킹 서비스를 개발해 가동에 들어갔다.
시장 상인에게 직접 찾아가 동전을 수납하기 위해 동전카트기를 운영하기도 했다. 지금은 신한금융사박물관에 소장된 이 카트기는 신한의 고객 만족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신한리스를 설립했고, 농협중앙회와 손잡고 신한투자신탁운용도 세웠다. 이 시기 중국 톈진과 베트남 호찌민에 해외 네트워크를 확보했다.
위기 극복의 시기 (1997-2000)
자산포트폴리오 다변화를 통해 충격 완화에 대비했다고는 하지만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를 비켜갈 수는 없었다. 임금 삭감과 명예퇴직 시행 등 여러 수단을 동원해 가까스로 적자를 면했다. 아울러 나라 살리기 통장을 도입했고, 재일동포들의 ‘모국에 엔화 보내기 운동’을 함께하는 등 국민과 함께 위기 극복을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했다. IMF 구제금융 당시 퇴출된 5개 은행 중 동화은행을 인수했다. 고비용 구조를 개선하고 영업 활동에 더 많은 역량이 집중되도록 사업부제를 도입했다. 기업금융과 소매금융 창구를 원스톱 뱅킹 체제로 개편해 고객가치를 높이는 데도 힘썼다. 국내 최초로 인터넷뱅킹 서비스를 시작했고, 인터넷에서 대출이 가능하도록 상품(사이버론)을 선보였다. 중소기업을 위해 전자결제 기능을 활성화하기도 했다.
지주회사 시대 개막 (2001-2009)
금융의 겸업화와 대형화 추세에 맞춘 경쟁력 확보를 위해 2001년 국내 최초로 민간 금융지주회사를 설립했다. IMF 직후 지속된 금융권 대형화 경향에 맞춰 국내 최고(最古) 은행 조흥은행을 인수해 신한은행과 통합했다. 업계 1위 LG카드를 인수해 신한카드와 합병했다. 굿모닝증권을 인수해 굿모닝신한증권으로 합병하고, 그룹 내 자산운용사 통합과 해외 제휴를 통해 신한BNP자산운용을 설립했다. 대형 인수합병을 하면서 구성원들의 감성 통합을 먼저 추구한 뒤 조직을 합하는 ‘선통합 후합병’ 방식을 택했다. 일본과 베트남에서 현지법인을 세우며 아시아권 교두보를 확보해 나가는 시기였다.
따뜻한 금융을 미션으로 (2010-2016)
일류 신한 (2017-2022)
2005년 금융권 최초로 사회책임 보고서를 발표한 바 있는 신한은 최근 강조되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을 새 성장 동력으로 삼기 위해 더 많은 역량을 쏟고 있다. 동아시아 금융회사 최초로 제로카본드라이브(Zero Carbon Drive)를 선언해 탄소 배출을 줄여나가도록 지원하고 있다.
신한금융그룹은 앞으로도 지난 40년의 성공 요인과 위기 요인을 분석해 재창업의 각오로 고객 관점에서 끊임없이 체질을 개선한다는 방침이다.
허진석 기자 jameshu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