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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안드레스 솔라노 한국 블로그]

입력 | 2022-07-08 03:00:00

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안드레스 솔라노 콜롬비아 출신 소설가


지난주 영화 ‘헤어질 결심’을 봤다. 왠지 모르게 내가 한국 단편소설 중 가장 좋아하는 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이 떠올랐다. 영화에서 흐르던 노래의 제목이 ‘안개’라는 걸 알고 난 후에는 영화와 단편 사이에 연관이 있을 것이라 확신했고, 박찬욱 감독의 인터뷰들을 찾아 읽어보기 시작했다. 그는 ‘안개’라는 노래가 영화를 만드는 데 큰 영감을 줬다며, 1967년 김수용 감독의 ‘안개’라는 동명의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곡이라고 했다. 하지만 인터뷰에서는 그 영화의 원작이 ‘무진기행’이라는 것과 당시 시나리오를 쓴 사람이 김승옥 작가라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무진기행’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돈 많은 과부와 결혼해 장인 덕분에 서울의 제약회사에서 승승장구하던 한 남자가 아내의 권유로 휴가차 시골 고향에 돌아가 며칠간 머문다. 자욱한 안개로 뒤덮인 그의 고향 무진은 그를 침울하게 한다. 어느 날, 그는 고향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서울에서 부임한 한 음악 교사를 만난다. 모두 함께 술을 마시고 난 뒤 주인공은 음악 교사와 둘만 남아 귀갓길을 함께 걷는다. ‘헤어질 결심’의 등장인물들처럼, 소설의 주인공과 음악 교사 사이의 기다란 대화 속에는 환심과 긴장이 교차하고, 이튿날 방죽에서의 재회로 이어진다. 여자와 남자 모두, 만남이 필연임을 직감하고 정사를 나누기에 이른다. 이 둘의 삶은 교차해버렸고 되돌아갈 길도 없다.

그러나 그날 밤 남자는 아내로부터 전보를 받는다. 급히 서울로 돌아오라는, 회사의 주주총회에 참석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곧바로 뒤돌아서 음악 교사에게 편지를 쓴다. “갑자기 떠나게 되었습니다. 찾아가서 말로써 오늘 제가 먼저 가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만 대화란 항상 의외의 방향으로 나가 버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글로써 알리는 것입니다. 간단히 쓰겠습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제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옛날의 저를 오늘의 저로 끌어 놓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할 작정입니다. 저를 믿어 주십시오. 그리고 서울에서 준비가 되는 대로 소식 드리면 당신은 무진을 떠나서 제게 와 주십시오. 우리는 아마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자는 이 편지를 두어 번 읽은 뒤 찢어버린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무거운 안개를 뒤로하고 무진을 떠난다.

내가 이 소설에 매료된 이유는, 1964년 이 글을 쓰던 당시 김승옥의 나이가 만 21세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김승옥 작가는 주인공에게 도덕의 잣대를 강요하지 않는다. 당시 한국의 사회 분위기를 상상하면 보기 드문 일이다. 작가는 ‘무진기행’에서도 여교사와 유부남이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이야기를 비난이나 비극의 시선으로 풀어내지 않는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자식을 낳는 도구로 취급되거나 특정한 사회적 역할만 요구된 측면이 강했는데, 김승옥은 그의 소설에서 여주인공의 욕망을 탐색한다.

음악 교사는 그저 순진하고 수동적이며 남자가 놓은 덫에 걸리는 그런 여성이 아니다. 반대로 자신이 감수하고 있는 위험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앞으로 나아간다. 그 관계가 겨우 한 주일짜리라는 것도, 결국 그는 떠난다는 사실도, 남들이 뒤에서 수군거리며 손가락질할 것까지 모두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음악 교사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삶의 어떤 순간에는 어느 날 오후 방죽에서 사랑이 무엇인지 문득 깨닫게 되는 사건이 일어나고, 우리는 그것이 그저 스쳐 지나가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 반드시 붙잡아 죽을 때까지 삶에 가두어 놓고 살아야 한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도 불륜을 그리고 있다. 어쩌면 그래서 박찬욱 감독도 인터뷰에서 어른들을 위한 영화라고 말했을 것이다. 나에게 이 영화는, 적어도 한 번 이상, 버린 적이 있거나 버려진 적이 있는 여자와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혹은, 어떤 관계에 속박되어 살아가며, 동시에 또 다른 새로운 사람과의 예기치 못한 만남이 주는 현기증의 마력으로부터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중에서도 특히, 사랑이란 젊은 시절의 특권이며 그 감정은 오래전에 끝나버렸다고 단정 지었던 사람들에게 일어난 사건에 관한 영화다.

내가 ‘헤어질 결심’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서래(탕웨이 분)와 해준(박해일 분)이 미결 사건을 두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서래가 살인을 저지른 남자의 범행 동기를 찾지 못하는 해준에게 던진 질문을 잊을 수 없다. “한국에서는 좋아하는 사람이 결혼하면 좋아하기를 중단합니까?”


안드레스 솔라노 콜롬비아 출신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