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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동아광장/최인아]

입력 | 2022-07-09 03:00:00

마흔 중반 막막함에 찾은 산티아고
한 달여 순례 끝 ‘인생의 길’ 해답 찾아
인생 중대사는 유불리 떠나 고민해야



최인아 객원논설위원·최인아책방 대표


16년 전 이맘때 나는 스페인에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산티아고 순례를 막 마친 참이었다. 프랑스 남부,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출발해 피레네 산맥을 넘은 길은 스페인 산티아고까지 800km나 이어졌고 나는 그 길을 다 걸어 마침내 성 야곱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에 가 닿았다. 피가 뜨겁던 십대 시절도 사춘기라고는 없이 얌전하게 지냈는데 마흔 즈음 뒤늦게 사춘기를 앓았다. 김두식 교수의 말처럼 ‘지랄 총량의 법칙’이 내게도 적용된 걸까. 그 무렵의 나는 막막했고 불안했으며 몸에 에너지가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길을 잃은 나는 길 위에서 길을 찾기로 했다.

순례자의 일과는 심플했다. 배낭을 메고 그저 걷는 것. 하루 대여섯 시간, 30km쯤 걸어 숙소에 도착하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이 땀에 절어 있었다. 찬물에 몸을 씻고 빨래를 해 넌 후 성당을 찾아 기도하고 나면 어느새 저녁이 되었고 동네 식당에서 소박한 저녁을 먹었다. 일찍 잠자리에 든 후 다음 날 아침이면 다시 길에 나서는 하루하루…. 일상을 사는 데 필요한 것은 정말로 얼마 되지 않아서, 갈아입을 옷을 꺼내고 나면 배낭이 텅 빌 만큼 최소한으로 보낸 ‘심플 라이프’였다.

그렇게 한 달여 걷는 동안 복잡하고 어지러웠던 내 마음은 청소라도 한 듯 말끔해졌고 고심하던 문제에도 해답을 얻었다. 당시 나는 마흔 중반을 맞은 ‘늙다리 쟁이’였는데 일을 얼마나 더 할 수 있을지, 앞으로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과 불안이 가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랬던 내가 순례 후 나를 괴롭히던 문제들로부터 ‘해방’된 거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한번 상상해 보시라. 하루 종일 걷는 사람은 무얼 할까? 맞다, 생각이다. 가끔 친구나 가족과 함께 걷는 이도 있지만 순례란 기본적으로 혼자서 가는 길이다. 인생의 질문을 품고 걷는 길에 깔깔거리는 대화는 어울리지 않고, 스페인의 태양은 무자비하게 뜨거워 즐겁게 대화를 나눌 상황이 되지 않는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이 흘러갔다. 흥미롭게도 생각이 시작되고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내가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여러 생각들이 번갈아 올라왔다. 처음엔 생각 A가 떠올랐고 조금 있으면 그와는 아주 다른 생각 B가 튀어나왔다. 그다음엔 생각 C가, D가…. 매일매일 그러기를 한 달쯤 했을 때 마침내 이 모든 생각들이 하나로 꿰어지며 ‘아!’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앞으로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머릿속이 환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 확실한 생각을 품고 6년을 더 일했고, 이제 때가 되었다는 느낌이 왔을 때 29년 일한 회사를 나와 다른 인생을 시작했다.

물론 산티아고 순례를 한 것은 정말로 잘한 일이지만 산티아고에 간 것이 핵심은 아니었다. 한 달 이상을 혼자 지내며 당시 나의 중대사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온몸을 던져 길을 찾으려 노력한 것, 그렇게 한 것이 잘한 거였다. 알다시피 기업은 중요한 일에 우선적으로 인력과 예산, 시간을 투입한다. 그렇게 해서 생존과 성장의 길을 찾아낸다. 그렇다면 개인은 인생의 중대사에 무얼 투자하나? 시간과 노력이다. 살다 보면 누구나 기로에 서게 되고 어느 길로 갈지 결정을 해야 하는 때가 온다. 중대한 문제인 만큼 시간과 노력을 최대한 투입해 후회 없는 선택을 해야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눈앞의 업무에 쫓기다 보면 중요한 인생사를 시간 날 때 잠깐씩 생각하고 충분하지 않은 고민으로 떠밀려서 정해 버린다. 혹은 타인에 의해 결정과 선택을 당하게 되거나.

내가 산티아고 순례에서 배운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적어도 인생의 절반쯤 산 후의 선택과 결정은 유불리가 아니라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결론에 도달한 후 내려야 한다는 것! 물론 우리는 많은 경우 유불리를 고민하며 그걸 기준으로 선택한다. 그래야 할 때가 물론 있다. 하지만 이런 질문, 앞으로의 인생도 지금까지처럼 살 것인지, 그래도 괜찮으냐는 질문마저 그렇게 대할 수는 없다. 인생의 길을 묻는 문제들을 유불리에 기대 선택하는 것은 자기 인생에 너무 무성의한 게 아닐까.

휴가철이란 개념이 많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여름은 많은 이에게 휴가철이다. 이번 여름엔 혼자 있는 시간을 길게 가져 보면 좋겠다. 결혼한 분들은 배우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최소 일주일은 혼자 걸으면서 중요한 인생사를 집중적으로 생각해 보시라. 그렇게 한 선택은 나중에도 별로 흔들리지 않으며 후회가 따르지 않는 법이니까.



최인아 객원논설위원·최인아책방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