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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인류 최초의 남극 탐험에서 마주한 인간성의 한계

입력 | 2022-07-09 03:00:00

◇미쳐버린 배/줄리언 생크턴 지음·최지수 옮김/472쪽·2만2000원·글항아리




1897년 10월 6일 적도 인근을 지나던 벨지카호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선원들의 모습. 같은 해 8월 벨기에에서 출항한 벨지카호는 1898년 2월 남극 대륙과 인접한 벨링스하우젠해에 진입했다(왼쪽 사진). 겹겹으로 둘러싸인 남극해의 해빙에 갇힌 벨지카호. 벨지카호는 1898년 3월 남극해에 정박한 지 1년여 만인 1899년 2월 12일, 얼음이 부서진 뒤에야 남극해를 탈출할 수 있었다. 당시 부선장은 항해 일지에 ‘우리의 모든 생각, 모든 영혼이 탈출을 갈망한다’는 기록을 남겼다. 노르웨이 팔로박물관·글항아리 제공

‘우리는 더 이상 항해사가 아닌 형을 선고받은 수감자들이었다.’

해가 뜨지 않는 기나긴 남극의 겨울이 배를 덮쳤다. 귓속을 울리는 칼바람보다 겹겹의 해빙을 탈출할 길이 없다는 공포가 더 매서웠다. 1897년 8월 16일 출항한 벨기에의 남극 탐험선 ‘벨지카호’는 6개월여 뒤인 1898년 3월 2일, 그토록 갈망했던 남극해 한가운데 갇히고 만다. “지구 최남단에 벨기에 깃발을 세우겠다”는 애국심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옴짝달싹 못한 채 남극해의 얼음덩이에 갇혀 지내길 1년. 인류 최초로 남극해에 진출한 벨지카호의 생존 선원 일지에는 ‘우리는 지금 정신병원에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미국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왕립 벨기에자연과학연구소에 보존된 선원들의 항해 일지와 회고록을 토대로 벨지카호가 1897년 8월 출항해 1899년 11월 벨기에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재구성했다. 노르웨이인 항해사 로알 아문센, 벨기에 사령관 아드리앵 드 제를라슈, 미국인 의사 프레더릭 쿡 등 널리 알려진 벨지카호 탐험가들이 남긴 일기에는 용맹스러운 영웅담이 아닌 생존자의 처절한 절규가 담겨 있었다.

항해는 시작부터 삐걱댔다. 이틀 만에 엔진이 고장 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센 파도에 휩쓸려 선원 한 명을 잃었다. 살아남은 선원 18명이 1898년 2월 남극해에 이르렀을 때 이들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지금이라도 철수할 것인가, 남극해의 겨울을 날 것인가. 선택의 순간 이들의 뇌리를 스친 건 명예였다. 남극에 닿지 못하더라도 남극해의 겨울을 버텨낸 최초의 인류로 남고 싶었던 것. 하지만 생사가 오가는 극한의 상황에서 명예를 선택한 대가는 참혹했다. 모든 선원들은 비타민C 부족으로 온몸이 퉁퉁 붓는 괴혈병을 앓았다. 배 안에 갇힌 시간이 길어질수록 신경쇠약은 깊어졌다. 히스테리성 질환으로 언어 능력마저 상실한 선원도 있었다.

저자는 벨지카호가 이룬 생물학적 성과 이면에 자행된 생물 학살도 짚는다. 벨지카호에 승선한 박물학자 에밀 라코비처는 남극 탐험 내내 400종이 넘는 생물 표본을 수집했는데 그중 110여 종은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발견이었다. 남극의 생태계를 확인할 수 있는 사료였지만 저자는 그보다 1년간 남극해에서 벌어진 학살에 주목한다. 생존자의 일지에는 연구나 식량 섭취를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즐기기 위해 펭귄을 사냥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책은 남극해 탈출과 고국 귀환이라는 극적인 순간으로 끝나지 않는다. 저자는 그보다 더 긴 생존 이후의 삶을 조명한다. 1899년 2월 배를 가로막은 거대한 얼음이 깨진 뒤 마침내 남극해를 탈출한 이들에게 남은 건 영광이 아닌 상처였다. 동틀 무렵 칠레 푼타아레나스 항구에 닻을 내린 선원들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고 놀라고 만다. 군데군데 빠진 머리카락과 핼쑥해진 얼굴, 텅 빈 듯한 눈동자…. 남극해의 겨울을 이겨낸 첫 번째 인간이라는 자부심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생존자 상당수는 생애 내내 정신질환을 앓았다.

인간의 밑바닥을 볼 수 있는 이 여정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싶지만 놀랍게도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우주 탐사 전 벨지카호의 선원이 남긴 기록을 들여다본다고 한다. 벨지카호 선원들이 겪었던 정신질환은 가까운 미래 화성 탐험가들이 겪게 될 증상일지 모른다. 지구를 넘어 우주라는 미지의 세계에 발을 내딛는 인류에게 벨지카호의 진실은 고통스럽더라도 직면해야 하는 이야기인 셈이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