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책의 향기]일상적 풍경 화폭에 담아낸 표현주의 예술가

입력 | 2022-07-09 03:00:00

◇가브리엘레 뮌터/보리스 폰 브라우히취 지음·조이한·김정근 옮김/296쪽·2만9000원·풍월당




독일 표현주의 화가 가브리엘레 뮌터(1877∼1962)란 이름을 듣곤 러시아 태생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를 먼저 떠올리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과 카미유 클로델, 멕시코 화가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의 관계에서도 볼 수 있듯, 많은 여성 미술가는 천재성과 독보적인 작품 세계에도 불구하고 남성 거장의 애인 혹은 뮤즈라는 수식어를 떼어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뮌터도 마찬가지다.

뮌터는 여성 화가를 ‘여자 환쟁이’라 낮잡아 부르고 ‘선천적인 아마추어’로 경멸하던 시대에 살았다. 독일 초현실주의 화가 막스 에른스트가 1858년 출간한 저서 ‘미술에서의 여성’에서 “여성은 미술을 할 자격이 있는가, 있다면 얼마나 있는가?”란 질문을 당당하게 던질 수 있을 정도였다. 20세기 초 독일 현대 미술을 이끈 표현주의 그룹이자 칸딘스키가 속했던 ‘청기사’의 멤버 프란츠 마르크, 아우구스트 마케, 파울 클레, 아르놀트 쇤베르크 역시 부인이나 동반자가 예술적 성취를 포기하고 내조하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들 중 성 역할 분담, 성별에 따른 능력 차에 대한 편견을 당연시하는 불평등 관계에 매몰되지 않은 이는 뮌터와 칸딘스키뿐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미술사적으로도 뮌터의 그림은 “칸딘스키의 영향을 받았다”는 간단한 문장에 갇히지 않는다. 뮌터는 추상에 천착하는 칸딘스키의 행로를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사물을 구상적으로 재현하려 했고 현실에 존재하는 일상적인 대상과 풍경에 대한 애착을 프레임에 담아냈다. 저자는 “비구상을 향해 가는 칸딘스키를 따라가지 않고 땅과의 접촉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를 유지하려는 절실한 욕구가 여전히 그녀 안에 남아 있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뮌터를 칸딘스키의 애인이자 뮤즈, 청기사의 주변인 정도로 축소하려는 미술계의 관습적인 평가에 도전한다. 태생부터 성장, 미술적 성취에 이르기까지 뮌터의 독립적인 삶에 초점을 맞춰 시대적 한계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방식을 자유롭게 실험해 온 미술가로 조명한다. 그렇다고 해서 뮌터의 삶과 작품에 칸딘스키가 미친 영향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뮌터를 가렸던 불필요한 수식어를 거둬 내고 새롭고 정확한 관점으로 한 명의 예술가를 다시 보려는 시도다.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