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격 있는 ‘선비 고을’ 영주 정겨움 한폭 놓인 외나무다리 서원과 테마파크로 보는 선비문화 예술혼과 피란민들의 보금자리
경북 영주 무섬마을로 들어가는 외나무다리는 오롯이 혼자 건너는 외로움의 길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렇게 마음이 굽은 듯 외나무다리를 건너거들랑 물너울에 마음을 뺏기지 말아야 한다’(위초하의 시 ‘무섬 외나무다리에 서면’)
《경북 영주는 소백산 자락에 둘러싸인 은자(隱者)의 땅이다. 산 깊은 골에 맑은 물소리와 글을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선비의 땅이다. 조선 최초의 서원이자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에서는 지금도 소나무 숲속에서 글 읽는 소리가 들린다. 휘돌아 가는 강물에 둘러싸인 무섬마을은 17세기 병자호란 후 출사를 단념한 선비들이 충절과 은자의 정신으로 들어가 살기 시작해 생겨난 마을이다. 그런가 하면 6·25전쟁 이후에는 피란민들이 모여들었다. 북한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은 풍기인삼과 풍기인견을 지역의 명물로 만들었다. 마을 공동체가 살아 있는 문화도시인 영주에서 품격 있는 선비문화를 체험하는 여행을 떠나 보자.》
○ 무섬마을로 들어가는 외나무다리
이른 새벽, 밤새 내린 비가 그치고 나니 새소리에 잠을 깼다. 새벽 공기에 강물 위에는 옅은 안개가 끼었다. 금빛 모래가 펼쳐진 들판에는 느릿한 강물이 곡선을 그린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는 노래가 저절로 떠올려지는 풍경이다. 강물이 산에 막혀 물도리동을 만들어낸 영주의 무섬마을. 무섬은 ‘물 위에 떠 있는 섬’이란 뜻이다. 행정지명은 수도리(水島里)다. 앞은 물로 가로막혀 있고 뒤는 산으로 둘러싸여 섬처럼 고립된 마을이다. 풍수지리상 ‘물 위에 핀 연꽃(蓮花浮水)’ 또는 ‘매화 떨어진 자리(梅花落地)’로 풀이되는 길지다. 17세기에 박수가 병자호란 후 출사를 단념하고 이곳에 들어와 만죽재를 짓고 살면서 생긴 집성촌이다.
오랜 세월 동안 이 마을에 들어가려면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했다. 널찍한 콘크리트 다리(수도교)가 놓인 후에도 S자 모양으로 생긴 외나무다리(약 150m)는 그대로 남아 있다. 반원형으로 자른 나무를 대충 다듬은 뒤 얕은 물길 위에 세운 것이다. 폭이 20∼30cm에 불과한 외나무다리를 건너면 짜릿한 스릴이 넘친다. 가끔 가다가 삐걱대고, 덜커덩거리는 외나무다리에서 원수를 만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행여나 물여울에 마음을 뺏겨도 안 된다. 물멀미가 나 균형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마주 오는 사람과 만나면 한 사람이 앉고, 그 위를 타고 넘어갔다고 한다. 지금은 중간중간에 ‘잠깐 비켜다리’를 만들어 놔 마주 오는 사람과 인사하고 대화도 나눌 수 있다. 무섬마을의 외나무다리는 드라마, 영화, 광고 촬영지가 되기도 하고,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돼 명소가 됐다.
다리를 건너서 들어간 무섬마을은 기와집과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골목길이 정겹다. 돌로 쌓은 담장에는 접시꽃이 한창이다. 초가집에는 ‘까치구멍집’이라는 설명이 쓰여 있다. 지붕의 용마루 양쪽에 구멍이 뚫려 있는 미음(ㅁ)자형 집이다. 까치구멍은 난방이나 조리 시 발생하는 연기를 배출하고, 낮에는 빛을 받아들이고 통풍과 습도를 조절하는 숨구멍 역할을 한다고 한다. 무섬마을에서 까치구멍집, 기와집 중에 골라서 민박을 해보는 것도 특별한 경험이다.
○선비문화 체험할 수 있는 선비세상
소수서원 강학당에서 글을 읽는 선비들
선비문화를 체험해볼 수 있는 영주 선비세상 테마파크.
공식 개관을 앞두고 22일부터 8월 15일까지 매주 토, 일요일과 광복절에 일반인을 대상으로 무료 임시 개방을 한다. 선비세상 퍼레이드 공연과 ‘힙(hip)선비’ 크루의 풍류한마당, 뮤직콘서트, 저잣거리酒페스티벌夜, 한스타일 플리마켓 등 다채로운 이벤트도 열릴 예정이다.
○마을공동체가 살아 있는 문화도시
영주 148아트스퀘어에서 열린 민경인 재즈피아니스트의공연. 이현우 씨 제공
○난세를 피해 오는 곳
6·25전쟁 직후 영주 풍기읍에는 북한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이 몰려들었다. 민초들이 난세에 몸을 보전할 최적지는 ‘교남양백(嶠南兩白·영남의 소백과 태백 사이)’이라는 ‘정감록’에 예언된 말을 믿고 온 피란민들이다. 이들 중엔 명주의 본고장인 평안도 영변 덕천 등지에서 남하한 직물공장 경영자와 기술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나무에서 실을 뽑은 인견사를 원료로 한 인견직물을 짜기 시작했다. 한때 풍기에는 인견을 짜는 집이 2000여 가구가 넘었다고 한다. 풍기인견은 시원하고 정전기가 생기지 않아 ‘에어컨 이불’ ‘냉장고 섬유’로 불리며 요즘 같은 끈적끈적한 여름철에 인기 만점이다. 풍기인삼이 명품 브랜드로 자리 잡는 데에도 개성과 황해도에서 앞선 재배 기술을 익힌 피란민들의 영향이 크다. 전국 냉면 마니아들의 순례지로 꼽히는 풍기읍내 정통 평양냉면집 ‘서부냉면’도 피란민들 덕분에 생겨난 곳이다.
영주에는 묵집도 많다. 그런데 묵집에서는 김치찌개와 비슷한 ‘태평초’라는 독특한 묵 메뉴가 인기다. 잔칫날 먹고 남은 메밀묵과 돼지고기, 김치를 넣어 끓여 먹은 찌개에서 유래한 음식이다. 먹고살기 힘들던 시절, 어머니께서 묵을 쑤어 배고픈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눠 주던 영주의 향토음식이다.
글·사진 영주=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