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PGA 3년8개월 부진 씻은 전인지 이번 아니어도 대회 계속 있기에… 골프 인생 현주소는 항상 18번홀 우승 갈증 길어져 부담 커갔지만, 취미 그림-아이스하키가 큰 위안 그랜드슬램 기회 잡은 것만도 감사
전인지가 11일 경기 성남시 남서울CC에서 디즈니 애니메이션 캐릭터인 아기 코끼리 ‘덤보’ 인형 커버가 씌워진 우드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덤보는 전인지의 별명이기도 하다. 호기심 많은 전인지가 귀를 쫑긋 세우고 남의 말을 듣는 모습이 귀가 큰 덤보를 닮았다고 해서 붙은 닉네임이다. 이 인형 커버는 2016년 대만의 한 팬이 직접 만들어준 것이라고 한다. 성남=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11일 경기 성남시 남서울CC 제2연습장에서 만난 전인지는 “당시 세컨드 샷을 마치고 그린으로 다가가고 있는 기분이 든다. 나에게 주어진 기회를 마주 보면서 어려운 퍼팅을 어떻게 홀에 붙여놓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18번홀이면 골프인생의 너무 후반이 아니냐고 되묻자 그는 “인생의 18번홀이 아니라 그저 오늘의 18번홀에 서 있는 것”이라며 “이번이 아니면 다음 대회가 있고 또 다음 기회가 있지 않느냐”며 웃었다. 3년 8개월에 걸친 기나긴 부진의 터널을 건너온 이의 내공이 느껴졌다.
2018년 10월 인천에서 열린 KEB하나은행 챔피언십 이후 전인지는 우승 갈증에 오래 시달렸다. 겉으로는 애써 괜찮은 척했지만 속은 곪아갔다. 전인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 전) 골프를 그만두고 인테리어 같은 새로운 공부를 할 생각도 한때 진지하게 했다. 기대에 빨리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다 보니 코스에서 부담이 점점 커졌다”고 말했다. 그가 느끼는 부담은 주변 사람들의 눈에도 보였다. 스승인 박원 코치는 “영혼 없이 골프 치는 사람 같다. 이럴 거면 그만두라”며 충격요법을 가하기도 했다. 전인지는 대회를 앞두고 열 살 터울 언니에게 하소연의 눈물을 쏟은 적도 있다.
롤 모델인 아널드 파머처럼 좋은 골퍼이자 좋은 사람으로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다는 프로골퍼 전인지. 성남=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우승 당일 전인지는 자신이 세운 ‘전인지 LCC(랭커스터 컨트리클럽) 장학재단’부터 찾아갔다. 전인지는 2015년 LCC에서 열린 US여자오픈에서 우승했고 이곳에 재단을 만들었다. 지금까지 50여 명의 학생, 주민 등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전인지는 “롤 모델인 아널드 파머(1929∼2016)가 좋은 골퍼이자 좋은 사람이었던 것처럼 나도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다”고 말했다.
2일 입국한 후로 전인지는 12월 그림 전시회를 준비해왔다. 또 국내에 있는 동안 취미 삼아 아이스하키를 하기도 한다. 아이스하키 실력을 묻자 “팀에 민폐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라며 웃었다. 꿀 같은 휴식을 보낸 전인지는 21일 시작하는 시즌 네 번째 메이저대회 에비앙 챔피언십 준비를 위해 15일 대회가 열리는 프랑스로 출국한다. 다음 달엔 스코틀랜드에서 열리는 AIG여자오픈(옛 브리티시오픈)에도 나선다. 이 대회에서 우승하면 국내 선수로는 박인비(34)에 이어 두 번째로 커리어 그랜드슬램(5개 메이저대회 중 4개 우승)을 달성한다. 전인지는 “그랜드슬램을 하면 좋겠지만 못 한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건 아니다. 그저 기회를 얻은 것에 감사하고 부담감을 컨트롤하면 좋은 퍼포먼스로 이어질 거라 생각한다”고 했다.
성남=김정훈 기자 hun@donga.com